2026년 영성일기

부활 신앙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3. 7. 07:07

2026. 3. 8. 토요일

요한복음 11:17-27

 

- 나사로의 죽음과 조문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마르다의 아쉬움과 믿음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이루실 줄을 아나이다.

 

-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과 마르다의 이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마르다의 신앙 고백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주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밝히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기독교에서 이 두 단어를 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부활과 생명을 허락하신

이 위대한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마르다는 이 진리의 핵심을 고백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나이다"

한 여인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놀라운 고백이 나올 수 있었을까?

제자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다. 영원히 살아 있다.

마르다는 부활의 개념이 처음에는 비록 미성숙한 고백이었다.

사람이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를 영접하고 거듭날 때 즉시 일어난다.

영적으로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영적 부활이다. 이것이 첫째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도 육체를 가진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부활이다.

마르다의 신앙은 나중에는 육체를 가진 몸으로 부활한다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을까?

 

마르다는 "주님이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실 줄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주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믿음,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이해가 수반된 고백이다.

오라비를 장사한지 나흘이나 지났는데, 주께서 무엇을 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가?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다는 고백이다.

나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는가?

 

마르다의 말 속에 서운함이 배어 있다.

마리아는 아예 집 밖으로 나와 영접하지도 않고 집에 앉아 있다.

마리아의 성격이라면 마르다보다 먼저 뛰어 나와 주님을 영접했을 터인데

토라져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집에 앉아 있었다.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주님의 적극적으로 살려주지 않으신 것에 대하여

인간적인 서운함이 진하게 배어 있다.

우리 생각이 주님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할 때 오는 인간적인 감정들이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줄 아는 모습으로 성숙해 가기를 소망한다.

 

주님 

진정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주님 안에 참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신 당신을 확실히 믿고, 주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며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부활의 몸으로 영생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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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 베다니를 찾아오신 주님은,

부활을 먼 미래가 아닌 '현재 살아 있는 자신'으로 계시하시며

마르다의 믿음을 고양하십니다. 

 

(17절)

나사로가 무덤에 안치된 지 '나흘'이 지난 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흘 동안만 머문다고 여겼기에,

'나흘'은 소생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기대가 끝난 자리에 새 일을 시작하시려고 

일부러 때를 맞춰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이 끝이라고 선언하는 시점은

주님의 일하심이 선명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23-27절)

마르다의 입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나사로가 여전히 무덤에 있는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마르다의 믿음을 높은 차원으로 이끄셨습니다.

말씀 묵상은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고 온전히 신뢰하게 됩니다.

 

( 25-26절)

마지막 날 부활 때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는 마르다의 말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부활을 미래의 사건에서 현재의 인격으로 치환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본질은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는

이미 부활 생명, 곧 풍성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10:3-4,10).

그에게 죽음은 생명을 삼키지 못하는 무력한 통과 의례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부활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지금 적극 누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8-19절)

많은 유대인이 찾아와 위로하지만,

누구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고

죽음이 안긴 상실과 절망을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죽음의 현실을 마주한 이들에게 필요한 진정한 위로는

부활의 복음입니다.

 

(20-22절)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말로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그러나 이제라도"라는 말로 예수님을 향한 여전한 신뢰를 그러냅니다. 

탄식 중에도 잃어버리지 않는 믿음은

예수님이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덧쌓으실 기초가 됩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일상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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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누웠다가 일어나는 부활 ]
찬송가 170장 내 주님은 살아 계셔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로 작정하시고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나사로의 죽음으로부터 나흘이 지난 시점에 나타나셨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의 영혼은 죽은 지 3일까지만 

다시 돌아올 희망을 가지고 육체 주위에 머뭅니다.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의 민간 신앙으로 보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말은 믿는다고 했습니다(22, 27절). 

그러나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24, 39절). 

설상가상으로 마르다는 예수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 원망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습니다(21절).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살아날 줄을 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는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은 살아 있는 고백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믿는데, 믿고 싶은데, 믿으리라 다짐하는데, 

아직 믿음이 몸에 새겨지지는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라비가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날 줄 안다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님을 영접한 자, 예수님께 연합된 자는 

즉각적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달해주시는 일개 선지자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요 소유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살리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몸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 몸조차도 지금 일으킬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서 그 때 일으키기로 정하신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님 안으로 믿는 자 곧 예수님께 소속되어 연합된 자는 

예수님의 생명에 연결됨으로써 

바로 죽음에서 생명 있는 존재로 살아나게(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나서(위로부터의 생명을 받아서) 예수님을 계속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의 문자적인 번역은 “네 오라비가 일어나리라.”입니다.

‘살아나리라’의 헬라어 ‘아나스테미’는

‘위’를 뜻하는 ‘아나’와 ‘서다’는 뜻의 ‘이스테미’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위로 서다’ 곧 ‘일어서다’의 뜻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이 ‘아나스타시스’로서 우리말로는 ‘부활’로 번역됩니다.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하시며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니까, 

제자들의 수준으로 죽었다고 다시 말씀하신 것뿐입니다(11:14절).

예수님의 수준에서는 나사로는 잠자고 있는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웠다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스타시스’는 단지 잠시 누웠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명백히 ‘부활’을 잠시 누웠다가 ‘일어나는 것’으로 가르치십니다. 

‘아나스타시스’에는 우리말 ‘부활’의 ‘부’에 해당하는 의미 곧 ‘다시’의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누웠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 곧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는 자는 이미 산 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계속 믿고 있는 한

(26절의 '나를 믿는 자는'의 정확한 번역은 '나를 계속 믿고 있는'입니다), 

그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예수님과의 연결을 끊지 못합니다

육체가 죽어도 그는 예수님과 계속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계속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나사로를 일으키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니라 누웠던 나사로를 일으키십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 일어난 것입니다.

주 예수님, 아직도 육체의 죽음이 두렵습니다. 

내가 생명이신 주님 안에 있으며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육체의 변화에 휘둘리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지금 내가 이미 주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시때때로 실감하고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육신의 사망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믿는 자의 부활은 단지 잠시 잠들었다가 일어나는 것임을 알고 

오늘도 평안히 잠에 들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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