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제 신 치현 목사님이 룻기 1장 15-18절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셨다.
제목이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1. 안전지대를 포기할 용기
2. 비난을 받을 용기
3.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
4. 실패와 멸망 당할 용기
[룻기]서 설교를 많이 들은 책이다.
또 들어도 새롭고 감동이 밀려온다.
성경에 나오는 여자 인물들 중에서 이방 여인으로 우뚝 서 있는 여성이 룻이다.
그는 모압 여인으로 이스라엘이 상종하지 않는 민족의 후손이다.
모압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아 멸망할 때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한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두 딸 사이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태어난 조상을 둔 민족이다.
모압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성전에 출입도 금지된 족속이다.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흉년이 계속되자 모압 땅으로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이주했다.
엘리멜렉은 모압에서 일찍 죽고 두 아들만 남게 되자 모압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그렇게 십 년쯤 살다가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유다 땅으로 향하다가
생과부가 된 젊은 두 며느리의 장래를 생각하고
자신들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자
큰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미니의 설득에 돌아갔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끝까지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고 나오미를 따른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사랑을 묵상하는 시간이었다.
나이 들어 홀로 된 시어머니가 먼 길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시작하자
그녀는 앞으로 닥쳐 올 모든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동행을 결심하고
나오미가 죽는 날까지 그녀를 봉양할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랑을 실천해 보였고
그녀를 통해 다윗의 조상이 나오게 되었고, 메시아가 그 후손으로 오시게 되었다.
어찌보면 그녀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예표이다.
룻의 사랑을 묵상할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룻이 천성적으로 사랑이 많은 착하고 선한 사람이었나?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만큼
어른을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아니면 결혼 후에 나오미의 삶과 사랑을 보면서 배우고 깨닫고 닮아가려고 하는 것인가?
나오미, 며느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며느리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 그녀의 삶도 조명해봐야 한다.
룻이 시어머니에게서 닮고 싶은 삶과 사랑과 신앙을 보았을 것이다.
시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렇게 자신의 삶을 바쳐 섬기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켰던 나오미
그녀가 있었기에 다윗의 조상, 룻이 존재한 것 아니겠는가?
이 나오미의 사랑에는 상기의 4가지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자주 룻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설교하는 것은
그녀의 행동을 따라가지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죄인인 인간의 속성 상 자기중심적이어서 이타적인 사랑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위인들이나 용기 있는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말하고 듣는 것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닮고는 싶지만 따라가기가 어려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오미보다 더한 사랑의 모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으로 이 땅으로 오심도
완벽한 하나님 나라에서 죄악된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수 많은 수난과 질고와 비난과 비웃음과 천대를 받으셔야 했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희생적 사랑의 결과는
happy ending 이 아닌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절망적이고 실패한 것 같아 보인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 누가 이같은 사랑을 따라 할 수 있을까? 닮고 싶어할까?
과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없이도 이런 사랑을 행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도, 삶도 닮아가며 따라가야 한다.
내 삶 속에서 이런 사랑이 있어야 한다.
설교를 들으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내 안에 이런 사랑이 없고, 한없이 부족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하였건만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사랑은 너무가 미미해 보인다.
[큰 바위 얼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주님을 닮고자 기도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반세기를 신앙생활 하였지만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요원하기만 하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이 그의 언행에서 흘러나와야 당연하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이야기 하실 때는 공감이 간다.
그래 나는 안 된다. 힘든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가능하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가능하다.
수도 없이 이 고백을 하고 살아가지만
already 와 not yet 시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힘이 든다.
수없이 넘어지고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나를
주님이 아실 것이다. 이해하실 것 같다.
오늘도 다시 일어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힘 주시고 능력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의 순례길 다 달려간 후에
그 곳에서두 팔 벌리시고 나를 기다리실 사랑의 주님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