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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진준목사의 요한복음 설교집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4. 12. 30. 17:27

책소개
본질의 회복,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의 회복을 위한
“다르게 생각해 보기!”

이 책은 저자가 LA한길교회에서 약 18개월에 걸쳐 설교한 요한복음 강해 설교를 모은 책이다. 

1권에서는 요한복음 1-4장, 2권에서는 요한복음 5-9장까지 다루고 있다. 

이전에 출간된 읽는 설교 시리즈(갈라디아서, 룻기)와 마찬가지로 

이번 요한복음도 현장 설교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냈고, 

성도들에게 메시지가 더욱 생생하게 전해지도록 노진준 목사의 화법을 글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저자는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요한복음의 주제를 ‘다르게 생각해 보기’라고 정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람들과 나누시는 대화 가운데 사고의 관점이 몹시 달라서 

마치 동문서답하는 것 같은 내용이 유난히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회복,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의 회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다르게 생각해 보면서 찾아가야 한다. 

이 책은 요한복음의 사건들을 재조명하여 성도가 추구해야 하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저자 소개 :

노진준 목사는 가슴 따뜻한 목회자이다. 이 땅의 모든 성도가 바른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잃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꿈꾼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성도에 대한 이해로 듣는 이에게 깊은 위로와 희망을 선사한다. 지금도 멈추지 않고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바른 복음의 길을 안내하는 열정적인 설교자다.

토슨 대학(Towson University) 수학과를 졸업하고(B.A.),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으로 석사(M.Div.)를 받고, 변증학으로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볼티모어 갈보리장로교회(1992~2009)와 LA한길교회(2009~2017)에서 담임 목사로 섬긴 바 있다.

저서로는 『노진준 목사의 다니엘서』, 『회복하라』(이상 지혜의샘)가 있으며, 『조직신학』(은성), 『성경 이미지 사전』,

『개혁주의 은혜론』(이상 CLC)등 다수의 역서가 있다.

 

출판사 리뷰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 오래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등장한다.
이렇게 예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일이 많지만 우리는 이런 가시적인 기적의 현상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은 이 모든 기적을 단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의 표적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현상과 능력에 주목하지 말고 예수님에게 주목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믿음으로 얻는 생명의 풍성함은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저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과 현실에 맞닥뜨린 인생의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대부분 사람이 죽었다 부활해야 영화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지만
천국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말하고 영생이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이 땅에서도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읽는 설교 요한복음」을 통해 성도들이 바른 복음으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기를 소망한다.

 

1권 목차

들어가는 글
1장_ 이 세상이 정말 살 만한가요?
2장_ 힘을 잃어버린 자녀 됨의 권세
3장_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4장_ 세례 요한은 아니었다!
5장_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6장_ 주님, 어디에 거하십니까?
7장_ 간사함이 없는 고백
8장_ 기쁨을 잃은 종교가 된 기독교
9장_ 성전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
10장_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지 않았다
11장_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
12장_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3장_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게 될 것이다
14장_ 내가 너를 사랑한다
15장_ 정죄함이 없으리라
16장_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
17장_ 하나님이 주신 것
18장_ 몹시 다른, 그러나 결코 다르지 않은!
19장_ 은혜는 모든 편견을 역행한다
20장_ 볼 수 없다 해도 거기에 있음을 아는 것
21장_ 땅의 것에만 머물던 관심이 달라지다
22장_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23장_ 전도, 진실함으로 우리가 믿는 바를 드러내다
24장_ ‘그러므로’의 역설적인 사랑을 입은 자들
 

2권 목차

들어가는 글
1장_ 생명이 없는 곳, 베데스다 연못
2장_ 나를 고치신 이는 예수라
3장_ 세상과 구별된 시간, 안식
4장_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
5장_ 성경의 목적
6장_ “내 말을 믿겠느냐?”
7장_ 잊힌 사람들
8장_ 기적을 가능케 한 사람들
9장_ 기적, 그 후 이야기
10장_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11장_ 하나님의 일
12장_ 원색적 복음
13장_ 우리는 가룟 유다가 아니다
14장_ 반복되는 이야기
15장_ 은밀하게,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16장_ 혼란의 이유
17장_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
18장_ 조직의 힘
19장_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20장_ 질문 뒤에 감춰진 진짜 의도
21장_ 많은 사람이 믿더라
22장_ 참된 자유
23장_ 누가 더 문제일까?
24장_ 하나님이 하시는 일
25장_ 왜 그렇게 하셨을까?
26장_ 다양한 반응들
27장_ 소신과 독선
28장_ 주님이 보이십니까?
29장_ 만나셨습니까?
 

3권 목차


들어가는 글
1장_ 주님의 음성
2장_ 풍성한 삶
3장_ 지체하심
4장_ 도마의 믿음
5장_ 마르다의 신앙
6장_ 눈물의 의미
7장_ 전혀 다른 죄
8장_ 나귀를 타신 왕
9장_ 변하면 다른 게 보입니다
10장_ 희생과 투자
11장_ 엉터리 신자
12장_ 하나님의 심판
13장_ 요즘 어떻게 섬기십니까?
14장_ 섬김을 위한 대야
15장_ 또 한 번의 기회
16장_ 예수의 독선
17장_ 주님의 약속
18장_ 보혜사 성령
19장_ 열매 맺는 가지
20장_ 이제 믿느냐?
21장_ 세상에서는 환난이 많으나 담대하라
22장_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23장_ 하나 되게 하소서
24장_ 주님의 마음
25장_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26장_ 베드로의 부인
27장_ 주님의 나라
28장_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
29장_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30장_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
31장_ 팻말
32장_ 아들입니다, 어머니입니다
33장_ 내가 목마르다
34장_ 아리마대 사람 요셉(1)
35장_ 아리마대 사람 요셉(2)
36장_ 빈 무덤
37장_ 주님의 인사
38장_ 나의 주, 나의 하나님
39장_ 갈릴리로 간 제자들
40장_ 베드로의 고백
41장_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경고
나가는 글
 
 
*** 들어가는 글
 
지금 우리는 팬데믹 시대의 막바지를 사는 듯하다.
단순히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19의 미약한 잔재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19와 상생해야 하는 불가피함, 혹은 상생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무서운 존재에서 불편한 존재로 신분이 격하된것 같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어 섰을 때, 
그동안 당연시하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것들임을 알았다.
또한 앞에 있는 것는 것만 실제가 아니라 옆에, 혹은 뒤에 있는 것들도 실제임을 알았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당연시하던 예배의 현장이 왜 소중한지, 그동안 얼마나 소비 지향적이었는지를 보았다.
 
요한은 2,000년 전부터 교회를 향해, 멈추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라고 외쳤지만
교회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내용보다는 형식에, 의미보다는 행위에, 마음에 중심보다는 결과에만 치중했다.
이제야 비로소 교회는 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을까요?
 
현장 예배인가, 온라인 예배인가가 화두가 되었지만,
결국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극단적 개인주의로 인한 자기 연민이 절정에 이르러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벗어나기 힘든 이  시대 교회가
단순히 그와 같은 이기주의를 합리화하거나 이에 편승해서 이익을 취하러 하기보다는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요한복음은 참으로 급진적이다. 
제자가 된다는 말이 완전하고 흠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더라도,
분산되지 않는 신뢰를 요구하기에 급진적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조직적인 응집력과 조직에 대한 헌신으로 견고한 체계를 갖추지 않더라도,
사랑함으로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하기에 급진적이다. 
 
요한복음은 심오하고 본질적이지만, 추상적이거나 막연하지 않다.
요한복음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삶을 보기 때문에
마치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어도 세상에 있음을 간과하지 않기에 긴장이 살아 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만 본질에서 벗어난 듯하고,
하나 됨을 강조하지먼 집단적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현대 교회에 요한복음의 책망과 경고는 신랄하다.
예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 앞에서, 그러면 제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집요하게 답을 요구한다.
이제 이 시대의 교회도 예수가 누구인지, 그래서 교회가 무엇이며,
제자가 어떤 이들인지  자신하게 답을 해야 한다.
[읽는 설교 요한복음] 3권의 설교들은 시대적 상황때문에 더욱 많은 생각을 하며 준비했다.
또한 [읽는 설교 요한복음] 3권의 청중은 달랐다.
요한의 복음서가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듯이, 설교자는 청중을 염두에 두고 설교를 준비한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이, 또한 언제 할지도 모르는 설교문을 미리 작성한다는 것은
글쓰기 훈련이 아주 잘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읽는 설교 요한복음] 1, 2권은 목회를 하면서 매주일 전한 설교들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본문과 씨름하고,
주일에 직접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본 결과물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그래도 긴 시간을 제법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 후반부에 대해서도 설교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미처 요한복음을 마치지 못하고 목회에서 은퇴했다.
언젠가는 요한복음 후반부에 대해서도 설교를 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던 차에
[읽는 설교 요한복음] 3권의 출간 의뢰를 받고 너무 감사했다.
하지만 막상 집필을 시작했을 때는 몇 달이 지나도록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저는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 말고는 글쓰기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자리든 설교할 기회가 생기면
거의 모든 경우에 요한복음 후반부를 본문으로 삼아 설교를 준비했다.
그리고 출판사로부터 제가 목회할 때와 마찬가지로
매주 목요일까지 설교 원고를 한 편씩 작성해서 보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일년 가까이 매주 설교를 준비했다.
 
[읽는 설교 요한복음] 1, 2권이 제가 한길 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할 당시 성도들에게 했던 설교모음이라면,
3권은 제가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했던 설교 모음이다.
그러니까 1, 2권은 한길교회 교인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염두에 두고 했던 설교들이라면, 
3권은 특정한 대상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그리스도인들, 흩어진 교회들을 염두에 두고
한 설교라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론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단순히 유대인이나 이방이 아닌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염두에 두고 전한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론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저는 요한복음으로 설교를 시작할 때부터 기독론적인 관점보다는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했지만
3권은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집중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위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주 한 편씩 보내는 설교 원고를 정리하는 것이 번거로운 일이었음에도
기꺼이 수고해 준 신현정 편집장과 원고를 꼼곰하게 읽고 성심을 다해 편집해 준 김세나 편집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이 책에서 흠을 발견한다면 모두 저의 미숙한 탓이다.  
'저의 졸필과 사고 능력의 한게로 인해 하나님이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들과, 제게 깨닫게 해주신 것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햇다는 아쉬움과 죄송함이 남기는 하지만, 부디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가족들에게 질문과 고민을 남겨 줄 수 있기를 바란다. 
 
 
 
*** 나가는 글
 
요한복음의 관점은 공관복음의 관점과 다르다.
이 관점의 차이는 청중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시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수십 년이 흘러 교회가 어느덧 틀을 갖추어서 지도자들을 세우는 과정을 만들고,
신앙 고백을 통해 교인이 되는 형식을 갖추었을 때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정형화, 구조적 갈등으로 인한 힘겨루기, 형식적인 신앙 고백이었다.
형식과 형태는 중요한 것임에도 자칫 원래의 목적을 상실해서
그 안에 담긴 내용보다 큰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대단한 사회적 특권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나름 특권 의식이 생길 만하니까,
내용보다 형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가능했다.

 

 저는 요한복음을 그 관점에서 읽고 싶었다. 

요한이 나중에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의 생애나 말씀에 관하여

공관복음이 기록하지 못한 여백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관복음이 세운 틀에 본래의 의미를 부여하고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다른 복음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바른 관점에서 복음서를 기록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요한은 시대가 변하면서 자칫 간과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서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예수가 누구인가를 소개하기보다는

그 당시 교회를 향해 예수가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 

요한은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사도로서

복음서를 통해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는 요한복음을 교회론적이면서도 기독론적으로 접근했다.

현대 교회가 예수가 누구인가에 피상적인 관심을 가짐으로

혹시 예수에 대한 교회의 고백이 너무 형식적이 되거나

복음을 구조적인 틀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요한이 당시 교회를 향해 한 말들이 이 시대 교회에도 매우 유효하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열두 사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일곱 명의 사도 이름만 언급한다.

물론 요한은 사도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사도였던 베드로의 입이 아닌, 나사로를 먼저 보내고 슬퍼하던 마르다의 입을 통해 전한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행하신 만찬 자리에서 제정하신 성찬 예식보다는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을 기록함으로

당시 교회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인가에 주목하도록 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일곱 번의 기적을 행하시는데, 

이 모든 기적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만난 제자들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은 모두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고백한 사람들이다.

흔들리고, 오해하고, 세상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백은 진실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저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직분이나 위치를 얻음으로써 

제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진실한 고백을 통해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탈진리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를 고백하고 예배하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시대에 교회는 예수의 주 되심을 통해서만 진검 승부해야 한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에 타협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고백의 피상성은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예수 없는 기독교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고백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백에 진실함과 진지함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교회론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보다 근본적으로 고백의 피상성에서 비롯된 기독론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교회의 모습,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싶은 진실한 마음보다는

서로 비교해서 남보다 낫다는 우월 의식이나 남보다 못하다는 열등 의식에 흔들리는 교회의 모습,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정체성으로 힘겹지만 믿음을 지켜 내는 저항의 흔적을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

고난의 현실 앞에서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바라보려는 열망을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 

세상적인 성공을 말하고 그 성공에 안주하려는 교회의 모습 ...

.

요한복음에서  이런 교회의 모습들을 보았다.

그리고 요한이 이런 교회에 주는 답은 다시 기독론이었다.

예수가 누구였는지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떡이며,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며, 부활이다.

그분은 양의 문이며 선한 목자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며,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 친히 성전히 되신 메시아이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이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있을 때에만 가지에 생명이 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을 때에만 생명이 있다.

우리 모두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