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틀 전에 EBS에서 에세이 작가가 에세이에 대하여 강의하는 것을 시청했다.
그내용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단 한가지
최근에 바쁘다는 핑게로 글 쓰는 일을 소흘히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강사는 에세이를 씀으로 인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적으로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작년에 비전트립 때 했던 강의, [나의 인생, my story]를 통해서 나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았다.
그 글을 통해 나의 삶의 궤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날들의 삶의 흔적들이 서로 연결되어 나의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글쓰는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울산교회 호산나 찬양대를 하면서 교회 홈페이지에 개설된 카페에 많은 글들을 올린 적이 있었다.
관리자의 부주의로 오백여 편이나 되는 글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없어져 무척 아쉽다.
이후로 울산신정교회에서 밴드를 운영하면서 다시 글들을 써서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개인 불로그에 적지 않은 글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언제가 딸과 사위가, 외손자(인우). 외손녀(인서)가 이 글들을 읽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기억해 주기를 소망해본다.
다행히도 많은 분들이 내 글들을 좋아해 주시고 칭찬해 주셨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것은 글의 진솔함, 진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휘력이 부족하여 표현의 한계를 느끼지만 그래도 괜찮다.
알고 있는 단어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글은 서로 소통하면 그만 아닌가?
상대방이 알아보지 못하는 비밀 코드같은 표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난해한 현대시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에세이가 편하고 좋다.
현대시가 특별한 의상이라면 에세이는 일상에서 입는 평범한 일상복 같다고나 할까
글을 쓰다보면 어떤 때는 감이 오면 거침없이 써 내려갈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한 줄 쓰기도 힘들 때가 종종 있다.
그럴때면 작가들의 마음, 마감 시간까지 원고를 보내야 하는 분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한다.
평소 풍부한 삶의 경험이 좋은 소재가 된다.
좋은 일, 슬픈 일, 아픈 기억들, 아름다웠던 추억들, 희망, 소망, ....
강사는 책을 읽거나 본 좋은 글귀들도 좋은 소재가 된다고 소개한다.
또한 어떤 일들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하는 습관도 글을 쓰는데 유익하다.
시공을 초월하여 경험한 일들이 얽히고 섞여서 씨줄이 되고 한 편의 에세이가 되는 것이다.
더불어 관찰력과 상상력도 글을 쓰는데는 좋은 습관이다.
동천강변을 걸으면서 여러 편의 글을 쓰지 않았던가
어찌되었던 내가 왜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정말 글쓰기가 좋아서 시작한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이단에서 빠져나온 후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지식에 대한 굶주림이 책으로 나를 몰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이단에 빠졌었다는 자책감이 더욱 기독교 서적들을 탐독하게 만들었다.
지난 30년 동안 참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호산나의 카페와 신정교회 밴드를 운영하면서
찬양대와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조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선전선동의 방편으로
글들을 쓰면서 글쓰기와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순수하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나에게는 무척 유익한 삶의 흔적이다.
독서는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는데 매우 유익했고
글쓰기는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길과 방법을 터득하는 도구였다.
그래서 대표 기도문을 작성하는데 두려움을 제거하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독서와 글쓰기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 방법 중에 독서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으리라.
직접적인 경험이 매우 좋은 방법이지만 여러가지로 제한을 받는다.
글 쓰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애써야겠다.
적어 놓지 않으면 금방 가 먹고 잊어버린다.
경험되고 생각되는 좋은 것들을 쉽게 망각에게 뺐겨버리고 마는 나이다.
기록은 나의 생각과 삶의 흔적들을 잘 저장하고 주변인들에게 전달해 줄 것이다.
다시 써 보자.
봄이 만물을 소생케 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