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앎이란...
본문 : 누가복음 10장 25-42절
어떤 율법교사사 영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예수께서 율법에 무어싱라고 기록되어 있느냐고 되물으시자
'네 마음을 다하며 묵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고 답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다.
율법 교사가 예수가 자신의 지식을 인정해주자 한 가지 더 묻는다.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
그러자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여 주시면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신다.
이어지는 마르다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 대접에 분주한 마르다와
예수님 앞에서 말씀에 청종하고 있는 마리아가 대비된다.
무엇이 좋은 편일까? 좋은 것을 택하였으면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앎이란 단어에 마음이 쏠린다.
어던 것을 머리로, 지식적으로 이해한다고 하여 그것을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어제도 '안다'는 단어의 의미가 부부가 서로를 안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삶으로 살아내지지 않는 앎이란 진정 앎이라고 할 수 없다.
믿음도 동일하다.
머리로 믿는다고 하고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지만
그 믿음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고백하고 시인한 믿음이 삶으로, 행함으로 증명될 때만이 진실한 믿음일 것이다.
율법교사는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행함이 없어
죽은 활자를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영생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된 이웃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조주가 피조물로 이 땅에 오신 그 길이 참 이웃이 되는 길이다.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이 사랑의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사마리아인의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때 생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그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참된 이웃이 되는 길은 앎을 행할 때이다. 사랑을 실천할 때이다.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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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잡을 이야기하는 유럽교사에게 그 정답대로 "행하라" 하신다.
율법교사는 율법이 말하는 영생의 길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삶이 없는 앎은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율법사는 살고 있다고 생각햇지만, 삶이 되지 않는 그의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하나님이자 동료 유대인인 예수님을 시험하면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율법사처럼 많이 알고 있고 또 타인에게 신앙의 삶을 촉구하는 자리에 있을수록 더욱 자신을 살펴야 한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누가 그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답하신다.
내가 어느 사람까지를 이웃으로 '받아들일지'의 문제를,
내가 먼저 이웃이 되는 '되는' 문제로 전환하신다.
유대인들에게 이웃 사랑은 부정한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유대 민족만을 이웃으로 받아들여 교제하는 일이다.
비유 속 제사장과 레위인이 벌거벗고 있어 신분의 식별이 불가능한 사람을 함부로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체와의 접촉올 부정이 전염되지 않도록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얼른 이웃의 범위에서 배제한 것이
유대인의 이웃 사랑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 개념을 뒤엎는다.
사마리아인은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자기 민족을 경멸하던 유대인인지 아닌지 식별하지 않는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는 그저 '강도 만난 자'일 뿐이다.
조건 없이 먼저 이웃이 되어 도와야 할 사람일 뿐이다.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지닌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따지는 일이 아니라,
내가 이웃으로 인정받는 일이다.
예수님 가까이서 교제하며 말씀을 듣는 특권을 어느 누구에게도 제한하지 않으신다.
랍비를 초대하면 남성들은 함께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며 가르침을 받았고, 여성들은 음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자기 발치에 앉아 말씀을 나누는 파격의 시대를 여신다,
마리아는 새 시대에 주어진 가장 좋은 특권을 선택하고 있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처벌받거나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앎으로 삶을 대신하지 않고 사랑을 행하고 참 이웃이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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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계명을 행하는 자]
시선의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됩니까?”라고 물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나의 이웃이 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니가 먼저 가서 그의 이웃이 되어 주어라.”는 교훈으로 응수하십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웃은 되어주는 것이지, 내가 골라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피하면, 내가 가만히 있으면 객관적으로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이웃이 될 수 없고
긍휼의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그 누구라도 이웃이 됩니다.
문제는 이웃이 누구냐가 아니라 이웃을 만들어내는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내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웃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애당초부터 불가능합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율법이 명한 바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산다고 하십니다.
이 진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먼저 가서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내게 아무 조건 없이 먼저 다가와 이웃이 되어주신 그분을 알고 믿게 되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분이 성령으로 내 안에 주인으로 오셔서 나의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내 바쁜 삶을 뒤로하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율법 교사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몰라서 그렇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알면
그것을 행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 율법 교사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가끔은 할 수 있겠지요. 억지로 흉내는 낼 수 있겠지요.
극기훈련이라 생각하고 꾹 참으며 잠깐 동안은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서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행동이 습관이 되고 삶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28절의 ‘행하라’와 37절의 ‘하라’는 진행의 뜻을 가진 동사형입니다.
‘계속 행하라, 계속 하라’는 뜻으로 그것이 삶이 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만이 이런 삶을 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그런 사랑을 하는 분이십니다.
내게 먼저 다가와 불쌍히 여기며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나를 살려준 분이십니다.
끝까지 나를 책임져 주는 충성스러운 사랑을 행하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 이 은혜를 확인한 자, 이 헤세드를 믿고, 그 분을 왕과 주인으로 영접한 자만이
이 생명의 계명, 영생의 계명을 행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주님 옆에서, 그 주님 앞에서 항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또 듣고 또 들을 때, 내게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영생이 내 것이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율법을 즐거이 행하는 자, 영생을 얻은 자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에게(40절) 한 가지만 제대로 하라고 권면하십니다(42절).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예,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주님, 죄인을 더럽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먼저 나서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셨기에,
이제 우리가 참된 이웃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내 삶을 맡깁니다.
주님이 내게 하신 것처럼 나도 내게 주신 힘과 능력을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 삶을 돌보느라고 이웃을 찾아 나설 여유가 없는, 예전의 삶을 계속 반복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명령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님이 내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실 것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마리아처럼 영생의 말씀 앞에 머물러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내가 그분을 주인으로 모신 가운데 그의 사랑을 배워
영생의 계명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