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과 마지막
본문 : 누가복음 21:5-19
어떤 사람들이 46년 동안 지어진 헤롯 성전을 바라보며 그 크기와 아름다움을 말하자
날이 이르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하신다.
사람들은 궁금하다. 저렇게 크고 견고한 성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진다니
그러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묻는다.
질문과는 뭔가 다른 내용처럼 들린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다.
많은 가짜 예수가 와서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할 것인데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또한 나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이 아니다 하신다.
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겟고,
곳곳에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신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너희들을 박해하고 회당과 감옥에 넘겨 주고
임금들과 집권자들에게 끌려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하신다.
재판 받을 때 자신을 변호할 구변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주위의 미음과 핍박으로 몇은 죽임을 당할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의 영혼을 얻으리라 하신다.
어쩌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계시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을 요약하신 것처럼 들린다.
종말시대에 겪을 일곱 재앙과 성도의 인내 그리고 신원의 이야기 말이다.
무디어지고 무감각해진 재림 신앙
마라나타를 부르면서도 마음은 감동이 없다.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기다림과 사모함이 있기나 할 것일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함으로 아니 냉냉함으로 아무런 감정도 없이
곡조를 따라 읍조리고 있는 자신을 본다.
주님을 향한 사랑함이 있으면 기다림은 힘들지 않고 인내할 힘이 생긴다.
그러나 의무감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고난의 길이고 불행한 길이며 힘든 기다림이다.
요한계시록의 두 사상이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것이고,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이다.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고 부활절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내 마음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 변화가 없다.
안타가운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다본다.
성령님 도와주소서
나의 이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고 무정한 나의 마음을 만져 주소서.
저의 안타까운 모습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의 마음을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소서.
놀라운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게 도와 주소서.
지금까지 듣고 읽었던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와 지식들이 머리에만 머물지 않게 하소서.
십자가의 길, 죽음, 그리고 부활의 신비와 오묘함을
머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게 도와 주소서.
그리고 입술로 고백하고 증거하며, 손과 발로 섬기며 살게 하소서.
영적으로 혼탁한 이 시대에 영분별력을 주시고
주님의 구원의 약속을 단단히 붙잡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입성과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소망을 날마다 되내이며
오늘도 믿음으로 인내하고 살아가게 하소서.
-----------옮긴 글
[임박한 심판의 때]
사람들이 성전의 위용에 감탄할 때 성전의 위기를 예고하신다.
회칠한 무덤과도 같고 또 강도의 소굴과도 같이 변질된 성전은
그 아름다움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철저히 파괴될 것이다.
주님은 겉이 아닌 속을 보신다.
교회의 외형이 작고 초라해도 그 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하다면 흡족하시겠지만,
아무리 겉모습이 크고 화려해도 그 속에 불신과 욕심과 시기가 가득하다면 비통해하실 것이다.
성전의 멸망이 있기 전에 제자들이 겪을 일과 그들이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내야 하는지 가르치신다.
먼저 메시아로 자처하는 이들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고, 기근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하지만 그런 현상들에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말 것은 그런 징조가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짜 예수', '가짜 구원자'를 앞세우고 왜곡된 종말론을 전파하면서
우리 '일상'을 무너뜨리는 유사 기독교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들의 거짓 메시지에 놀라거나 미혹되지 말고, 헛된 기대나 지나친 두려움을 주입하는 소리를 걸러내야 한다.
제자들이 박해받고 무고하게 재판받을 것을 예고하신다.
동시에 그들에게 뛰어난 '구변과 지혜'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대로 제자들은 권력자들 앞에서 재판받고 옥에 갇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법정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고(행 4;13-22) 감옥을 전도의 현장으로(빌1:12,13) 만들 것이다.
그러니 제자는 박해 업슨 순탐함이 아니라 박해에 굴하지 않는 순전한 믿음을 구해야 한다.
제자들이 가족과 친구에게 미움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하 ㄹ것을 예소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겟다고 약속하신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복음은 강력하게 배척받고,
믿음으로 사는 이들을 향한 핍박도 거세질 것이다.
그러나 핍박자들이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이 주시는 부활과 영생은 빼앗지 못한다(12:4,5)
그러니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제자의 길에서 만나는 미움과 박해ㅔ를 견뎌내야 한다.
거짓에 미혹되지 않는 영적인 분별력과 환난을 견디는 인내를 주소서.,
------------- 옮긴 글
[ 마지막 날의 예행연습 ]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자들이 예수님께서 그것들이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하자
두려워하며 그날이 언제쯤일지를 묻습니다. 그날을 대비할 수 있도록 징조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징조를 알고 미리 대비하면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종말을 잘 준비하는 것은, 종말의 위험을 미리 예상하고 잘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기대와 다릅니다.
미리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4절).
징조가 있다고 해서 바로 그날이 닥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9절).
그날을 맞이하는 가장 좋은 준비는 믿음으로 잘 견디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지막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5-6절)
화려한 성전의 외양에 감탄하며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그때는 그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날은 이 세상의 가치들이 박살나고, 부인당하는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그 속에 품지 않고 있는, 껍질뿐인 모든 외양들은 다 무너뜨려지는 날입니다.
(7-9절)
그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세상의 가치가 부정을 당하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 성도가 하늘의 가치를 드러낼 것을 기대하며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날이 왔다고 소란스럽게 호들갑을 떨지 않고,
우리 안에 이미 확보되고 가꾸어져 있는 하늘의 가치, 영원한 생명(19절, 영혼=목숨) 때문에
담대하게 그 날을 맞이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10-19절)
그래서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마지막 날의 예행연습을 하게 하십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무서운 일과 큰 징조들을 보게 하십니다.
세상이 우리 몸에 직접 손을 대어 박해하고 옥에 넘기며 권력으로 억압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그 일에 힘을 합하여 우리를 죽이는 데까지 이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들이 마지막 날 전에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곧이어 마지막 날이 도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이 이르기 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목적은 우리에게 믿음의 단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물리적으로 맞서 싸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똑같이 힘과 권세와 기술을 동원하여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단지 인내로 견디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날조차 담대하게 맞이해야 할 우리가, 단지 예행연습에 불과한 일들 때문에
호들갑을 떨어서야 되겠느냐는 말씀이십니다.
마지막 날은 우리의 재주로 피하거나 우리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그날은 미리 대비하면 피할 수 있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잘 준비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날도 아닙니다.
그 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날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날의 예행연습요령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잠잠히, 담대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증인이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 상황을 증거의 기회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자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에게 확증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13절의 문자적인 번역은 ‘이것이 너희에게 증거를 위한 것이 될 것이다’입니다.
‘증거’ 앞에 목적을 표시하는 전치사 ‘에이스’가 붙어 있습니다.
[13절, 표준새번역] 그러나 이것이 너희에게는 증언의 기회가 될 것이다.
묵묵히 당하고 있을 때, 반론하려고 애쓰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대적의 말문을 막아 주시는 것을 경험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호하시는 것을 체험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날에도 그리하실 것을 미리 맛보여 주신다는 거지요.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확신이 없는 것은, 그래서 아직도 불안한 것은,
자꾸 증거의 기회를 피했기 때문이네요.
세상적인 가치가 부정당하는 상황을 계속 회피했기 때문이네요.
난리를 두려워하고 피하려 했기(9절) 때문이네요.
아직 끝이 되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이상한 소리에 현혹되었기(8절) 때문이네요.
내 힘으로 난리와 재난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네요(14절).
주님께서 무너뜨리실 때 순순히 무너지면;
무너진 폐허 속에서 진정한 가치, 영원한 생명이 솟아나는 것을 볼 터인데...
묵묵히 바보 취급을 당하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지혜가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증언할 수 있을 터인데...
주님, 제가 이렇습니다.
증거를 원하고 확신을 원하면서 증거의 기회, 확신의 기회를 언제나 날려 버립니다.
마지막 날의 예행연습 잘할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진짜 마지막 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
속수무책의 날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믿음 준비시켜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