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자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5. 9. 09:05

본문 : 시편 119편 129-144편

 

말씀의 빛으로 주의 자녀들을 생명의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

우둔한 사람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생명의 길을 떠나 '사망의 방'에 이르고 말 것이다(잠 7:7,27).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밝히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이 비추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엡 1;17-19).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시고

또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어두운 우리 눈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러니 성경을 묵상할 때도 우리 마음을 열어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119:18).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하나님이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와 평강을 베풀어주시는 특별한 시간이다(민 6:24-26).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은 말씀이 주는 생명력을 알기에

그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얻어먹기 위해 헐떡인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시42:1),

광야의 시인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간절히 물을 찾듯이(시 63:1),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오늘도 주의 말씀과 그 말씀이 일궈내는 하나님의 일을 갈망한다.

오늘 우리가 정말 갈급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하자.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보며 시인의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며,

하나님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했다고 했다(렘 13:17).

하나님의 이름으로 욕되게 하는 지금 우리 시대를 향한 경건한 성도의 애타는 마음이 그려진다.

바울의 시대처럼 지금도 여러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빌 3:18)로 행하고 있음을 바라보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반성하며 돌아보자.

 

주의 말씀을 향한 열정이 시인을 삼켜버릴 정도로 강렬하다.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처럼(요 2:17),

이 열심은 하나님 자녀의 유익에 자신을 순응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거짓과 욕심에 물들지 않은, 말씀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나를 사로잡길 소망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하듯이 날마다 제 영혼이 주의 말씀으로만 만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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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계명이 즐거워지는 은혜 ]
​​찬송가 205장 주 예수 크신 사랑

<시편 119:129-144>
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33.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134.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135.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39.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말씀으로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새로워지니 

이전에 부담스러웠던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스러워집니다. 

놀라운 말씀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됩니다. 우째 이런 일이...?

(130) 

주의 말씀을 열어주는 빛이 비쳤기 때문입니다. 

우둔한 나를 성령님께서 깨우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말씀에 감탄하면서 그것을 지키게 되었습니다(129절). 

(131-136) 

이제 주의 말씀을 사모하되 가치를 알고 사모하니 그 사모함이 더합니다(131절). 

이 ‘사모’함은 그냥 말씀 자체가 좋아서, 말씀을 먹고 싶어서 헐떡이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132)도, 박해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구(134)도 모두 말씀을 사모하는 소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134절의 간구를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단순한 억압과 손해에 대한 회피를 간구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133절 및 135절과 연결되어 134절을 이해할 때, 

이 박해는 말씀 사모를 방해하는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계명을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하였던지, 대적들이 주의 계명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136), 분노할 정도입니다(139).

(137-144)

이전에는 계명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복들을 소망하며 말씀을 가까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씀 자체가, 계명 자체가 너무나 가치 있고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주의 계명과 말씀의 의로움(137, 138)과 순수함(140)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복과 상관없이, 심지어 멸시와 환난과 우환이 닥쳐도,

주의 법도를 잊지 않으며 주의 계명을 즐거워합니다.

말씀을 깨닫게 되고(130절), 말씀의 가치를 알게 되며(129절), 말씀에 굳게 서는 것(133절),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131절) 말씀이 즐거워지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132절). 

은혜! 은혜! 하는데, 다른 것이 은혜 아닙니다.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을 깨달아 말씀을 사랑하게 된 자가 생명을 얻습니다(144절). 

말씀을 깨닫게 되어, 말씀이 생명이고, 말씀이 유익이고, 말씀이 최고의 가치임을 알게 된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외적 방편을 기도, 말씀, 성례라 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8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외적인 방편이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외적인 보통의 방편은

      그의 규례인데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며,

      이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효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을 말합니다. 

세례는 성령님께 사로잡혀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살게 되는 구원을, 

물에 잠겼다 꺼냄을 받는 예식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말씀의 강에 푹 잠겨서 옛사람은 죽고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이 새롭게 일어나는 구원을, 

의식을 통해서 자신과 교회 앞에 선언하는 예식이 세례입니다.

세례 의식은 평생에 한 번이지만, 

우리는 예배 시간마다 이 세례 의식을 되새기며 세례 때에 고백한 신앙을 반복하여 고백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본래 세례신경이었습니다. 

세례받을 때 고백한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이었습니다. 

예배 때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의미는 세례의 순간을, 그 믿음의 고백을 재확인함에 있습니다.

성찬은 더욱더 말씀과 뗄 수 없는 의식입니다. 

지금은 분기나 월에 한 번 하는 정도지만, 초대 교회는 매주 성찬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예식이 성찬식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선물로 주어지고,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의 떡 곧 생명의 말씀, 생수를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신다는 의미는,

우리 안에 온전히 예수님의 가치관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피가 되고, 예수님의 살이 내 살이 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심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생명의 떡, 생명수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생명의 떡도 말씀이요, 생명수도 말씀(살아 있는 말씀=성령)입니다.

기도도 말씀과 연관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불러서 뭔가를 시키려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해 달라고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우리 아버지십니다. 

아들인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고 싶을 때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인 성전을 기도의 집이라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이사야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누가복음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과 뜻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시면서 

이 말씀이 성령님을 구하라는 뜻이라고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눅 11:9-13).

은혜받는 삶, 복 받는 삶은, 주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계명을 준행하는 삶을 결코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좋아져야 됩니다. 계명이 사랑스러워져야 합니다. 주의 계명이 신나고 즐거워져야 됩니다(143절).

말씀을 주야로 삼시 세끼 먹고 마실 때에야, 그래서 말씀이 체질화될 때에야, 

비로소 말씀이 내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맛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즐거움을 알아보지 못하게 억압합니다. 

그래서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옛사람을 몰아내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 자기 부인의 고난이 필수적입니다. 

그럴 때 말씀의 가치에, 말씀의 사랑스러움에 눈을 뜨게 됩니다. 

율법은 지켜 행해야 복을 받습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할 때 영생의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 언약, 행위 언약은 인간의 무능력 곧 죄 때문에 폐기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언약을 주셨습니다.

새언약은 옛언약과 순서가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은혜받기 위해서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 옛언약입니다.

그러나 새언약은 율법을 준행하기 위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받으면, 은혜 안에 거하면, 은혜를 깨달으면;

율법은 자연스럽게, 자동으로 지켜 행하게 됩니다.​

​은혜받기 위해서,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심령에 가득가득 채워야 합니다.

언제까지?

말씀이 즐거워질 때까지입니다.

말씀이 완전히 내 피가 되고 살이 될 때까지입니다.

 

아멘!

 

아직도 혼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깨닫지 못하여 설명과 가르침에 많이 의존해야 한다.

성경 교사를 소망하지만 요원해 보인다.

성령님 도와주소서.

이 무지한 자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잘 깨닫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읽고 깨닫는 은혜가 부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