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기쁘게 편지를 쓰다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5. 23. 09:01

본문 : 빌립보서 : 1장 1-1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한다.

 

당신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게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위한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안에 이 착한 일(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장함에 당신들이 나와 함께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당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중인이시다.

 

내가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당신들의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서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쁨이 가득한 마음을 담은 편지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고 누군가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고 싶다.

외향적이지만 소심한 자신을 돌아 본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강한 척 하지말자. 아무 문제가 없는 척 숨기고 태연하게 행동하고 외식하지 말자. 

감정에 진실하자. 솔직하자. 있는 그대로 들어내고 살자.

인간은 누군가로 부터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존재이다.

사랑의 굶주림은 정서적으로나 관계나 실제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기쁨이 사라지고 웃음이 사라진 요즘 바울의 기쁨을 생각한다, 

그는 지금 옥중에 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이국땅 감옥에 감혀 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중에 기뻐할 수 있고 기쁨의 편지를 쓸 수 있는 바울이 존경스럽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상황에 게으치 않고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모든 감정과 생각과 계획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려고 날마다 새벽을 깨우지만

작은 것 하나에도 감정이 휘둘리는 아침이다. 

바리새적 생각이 온통 나를 옥죄고 있다

내 안에 사랑이 매마르다보니 사랑의 눈으로 보기 보다는 정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의 충만으로 마음을 채워달라고 기도하지만

죽어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것들이 아직도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내 손에 욺켜진 것들을 놓아야 십자가를 붙들 수 있는데 ...

내 안에 죄악된 것들을 비워야 내려놓아야 예수님이, 성령님이 내주하실 수 있는데 ...

오호 통재라 !

얼마나 내려놓고 비우고 죽어야 바울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을까?

성령이여 이 연약하고 허물많은 인생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를 채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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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외 기도 ]

 

옥중에서 바울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의 교제에 참여한 빌립보 성도들을 기억하며 감사한다.

바울을 향한 교회의 신실함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도 여전히 극진하다.

 

바울은 자주 쓰던 '사도' 대신 이례적으로 '종'이라고 소개할 뿐만 아니라 '디모데와 함께' 보낸다고 밝힌다.

이것은 편지 내내 강조되는 '겸손'과 '하나'됨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바울은 서두에서부터 '자기를 비우고 내어주신'(2:7)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일에  모든 성도가 부름을 받았고,

성도 역시 바울과 디모데처럼 복음을 위한 일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빌립보 성도를 어찌나 사랑하는지, 옥중에서도 바울의 마음은 성도를 향한 감사와 기도로 가득하다.

그 사랑의 관계는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했고, '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든든한 기초는 나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이다.

내 안에 사시는(1:21)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의 사랑만이 포기하지 않고 지체를 사랑하게 한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의 첫날'을 가능하게 한 것이나, 빌립보 성도의 현재의 신앙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 모든 원인을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찾는다.

빌립보 성도를 기억하면서 감사로 가득했던 바울의 마음도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예배로 이어진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다.

 

바울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 매인 자신을 변함없이 신뢰하고 지지해준 성도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전한다.

복음으로 시작된 관계, 그 관계의 온기는 서로를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유지된다.

'홀로 버팀'보다 '서로 기댐'이 아름답다.

 

바울은 그 무엇보다고 사랑의 성장을 위해 기도한다.

이를 위해 구한 것이 지식과 총명이다.

그래서 선한 것을 분별하고 신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바랬다. 

그것이 주께서 바라시는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갈수록 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사랑의 사람이 되자.

 

주님의 은혜로 시작된 제 삶이 주님의 손에 이끌려 사랑이 풍성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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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확신의 두 가지 증거 ]
​찬송가 496장 새벽부터 우리

​빌립보서의 별명은 기쁨의 서신입니다.

첫머리(1:3, 4절)부터 감사와 기쁨에 대한 고백이 나타납니다.

기뻐한다는 고백, 기뻐하라는 권면, 기쁨이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1:18, 25; 2:4, 17, 18, 28, 29; 3:1; 4:1, 4, 10, 18).

특히 4:18절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기쁨'은, 그 주어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사도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이 전이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도가 따라서 기뻐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왜 기뻐하며 기뻐하라고 권면하는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동일한 기쁨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게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형제들, 사랑하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나 자신의 구원 확신과 거의 동일하게 중요한 일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구원의 영광을 받을 수도,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문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으니, 

우리는 구원에 관해 아무것도 기여할 것이 없으니, 

구원 문제에 신경을 꺼야 할까요? 

더구나 나의 구원이 아닌 남의 구원 문제에는 더욱더 그러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구원이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원이 ‘우리’의 구원 곧 공동체적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구원이기에 다른 사람의 구원이 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공동체적 구원이기에 사랑하는 형제들의 구원이 내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에 대해 확인을 하고 싶어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기를 원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얻기 원합니다. 

1등 당첨된 복권을 한 번만 확인하고 끝내지 않고 또 보고 또 확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허벅지를 꼬집어보며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공동체적 구원이기에 

우리는 내게 대해서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도 구원을 확인하고 증거를 얻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받는 구원이 온전한 구원이고 참 기쁨이 되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구원의 증거, 구원 확신의 근거를 오늘 말씀 가운데서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두 가지 증거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한 끝까지 그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첫째 증거는 주관적인 증거입니다. 

6절에서 '확신하노라'고 고백한 후에, 7절에서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 한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내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님께로부터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그는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의 마음에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주 예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주 예수님께서 택하셨기에, 그들에게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기에, 

예수님께서 사도로 부르신 바울의 마음에 그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마음에, 특별히 복음 증거의 직분을 받은 자의 마음에, 

어떤 사람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고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자라는 간접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주관적인 증거는 그야말로 주관적이어서 우리의 감정이나 잘못된 지식과 판단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관적인 증거만 이야기하지 않고 객관적인 증거도 이야기합니다.

객관적인 증거는, 사실 주관적인 증거와 술어는 같고 주어와 목적어만 바뀐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에 일어난 일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복음 증거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배우고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매임과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한 자임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객관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복음의 영광을 믿는 자는, 복음을 배우고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참된 사랑입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게 된 사랑입니다(9절). 

마침내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11절).

정말 사랑한다면, 정말 복음의 영광을 믿는다면,

복음을 배우고 전하는 일에, 복음을 더 확실히 믿고 믿게 하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돈보다, 건강보다, 명예와 칭찬보다 복음에 더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사랑, 가장 참된 사랑은 복음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복음을 믿는 믿음이 없어 보일 때, 가장 염려가 되고 기도가 되며 눈물이 납니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자녀에게 복음을 믿는 믿음이 조금 생긴 것 같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짝 엿보일 때, 

안도의 감사가 나오고 기쁨의 찬송이 나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아버지 된 자들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집값이 크게 올랐다고 같이 기뻐하기보다, 

큰 병에서 회복되어 건강해진 것 때문에 감사하기보다, 

자녀가 좋은 직장에 들어간 것으로 즐거워하기보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속에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복음을 배우고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 마음에 복음에 대한, 서로에 대한 사랑이 꽃피고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증거입니다.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