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의 입성
본문 : 역대상 15장 1-29절
포로 귀환 세대의 삶의 중심은 성전 중심이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저자는 4장에 걸쳐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옮기는 일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윗은 철저히 준비한다.
왜 실패하였고 웃사가 죽었는지, 무엇을 어겼는지, 무엇이 바른 방법인지 ....
두번 다시 실패는 없어야 한다.
다윗은 실패했다고 낙심하여 주저 앉아 있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원인 분석이 끝나자 준비에 돌입한다.
언약궤를 모셔 둘 장소를 정하고 장막을 치며, 언약궤를 어떻게 옮기는지 율법책을 샅샅히 조사한다.
그리고 지도자들과 레인인들과 제사장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의논하고 절차에 대하여 상의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구한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부터 하나님의 뜻에 전적인 의지와 복종을 의미한다.
단순히 언약궤를 옮기는 데 소수만 동원하지는 않는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동참하며, 즐겁게 노래하고 찬양하면서 언약궤를 옮긴다.
다윗도 이 무리에 함게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함이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이 예배가 아니겠는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생각케 한다.
그러나 저자는 15장 말미에 사울의 딸, 다윗의 아내의 태도를 적어 놓는다.
사울과 그의 식솔들이 언약궤를 어떻게 대하였는지 다윗과 대조시킨다.
사람의 어떠함을 알아보는 것은 하나의 행동을 가지고도 어느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
무슨 생각과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지 분별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속담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언약궤를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게 묻고 뜻을 구하지 않았던
사울왕과 그의 가족들의 흥망성쇠도 자명하다. 사울왕과 자식들은 전쟁에서 죽고 가문은 망하고 말았다.
새벽 메시지 처럼 하나님게 구하고 누리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사소한 것가지도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부터 열까지,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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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가 입성하던 날]
언약궤를 옮기려 했던 다윗의 첫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약궤-를 모셔 오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고 '임재' 안에 머무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으로 보겠지만,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로 인식했다.
이 관계 속에서 살고 일했다.
나는 하나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그분의 임재와 통치를 사모하는 예배자로 살고 있는가?
언약궤를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긴 후 3개월 동안,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옮겨 오기 위해 철저히준비했다.
안치 장소를 마련했고, 하나님이 정하신 운반 방법을 찾았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 심혈을 기울였다.
다윗은 실수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고 행동을 수정한 사라이었다.
자기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울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인정하고 개선하고 노력할 때 실수는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다윗은 율법의 지시를 따라 '레위 사람'을 택하고, 언약궤를 수레에 싣지 않고 그들의 '어깨에 메도록' 지시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과 '정하신 방법'을 따른 것이다.
나느 어떤 일을 할 때,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원리를 따르고 있는가?
혹시 합리성과 경험에 근거한 나만의 방식을 더 의존하고 있지는 않는가?
말씀에 의존하는 것만이 진정한 성공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다.
언약궤의 입성에 온 이스라엘은 기쁨과 감격으로 환호한다.
그러나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은
기쁨으로 춤추는 다윗을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즐거움에 동참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윗을 향한 비웃음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무관심과 경시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의 마음을 살펴보자.
구경꾼이나 비평가가 아닌, 진실한 예배자로 참여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의 임재와 통치를 사모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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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순종과 즐거움 ]
다윗은 톡톡히 대가를 치르고 뭔가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하나님의 규례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레위인에게 맡겨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일을 겸비한 마음으로 결행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졌음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시도합니다.
[삼하 6: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절) 다윗은 먼저 언약궤를 안치할 장소를 준비합니다.
1절의 의미는 다윗이 자기 궁전을 지으면서, 그곳에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자기 궁전과 별도로 먼저 마련하지 않은
다윗의 행동을 불경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성과 순위가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복종입니다.
정성을 많이 기울이고, 순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본주의 종교의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1순위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궁전도 하나님의 것, 장막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지 종의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목사가 되든 목수가 되든 겸비하게 순종하는 자가 되면 됩니다.
또 실제로 다윗은 궁전 짓는 일보다 언약궤를 옮겨오는 일을 먼저 하려 했습니다.
‘베레스 웃사’의 일이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중단되고 궁전을 먼저 짓게 된 것이지요.
(2-15절)
다윗은 이제 온 이스라엘 앞에 선포합니다.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다고. 레위 자손이 메지 않고는 하나님의 궤를 운반할 수 없다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외에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섬길 수 없다고.
언약궤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언약궤를 통해 보이셨습니다.
언약궤를 향한 길은 피뿌림의 번제단을 통과하여 나 있습니다.
떡상과 등대 사이로 나 있습니다. 분향단을 넘어서 나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린 자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규례대로 그 앞에 나아가지 않는 자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정성을 기울이고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 길,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길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13절의 ‘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나아가지 아니하였음’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에 접근할 때, 곧 나아갈 때,
규례대로 하지 아니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임을 다윗은 두려운 일을(13:12) 당한 후 깨달았습니다.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복종하는 것이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입니다(15절).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려 한 것은, 선의와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충심이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시며 진노하신 것은, 좀 너무하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나쁜 의도로 한 것 아닌데, 하나님에 대한 충정으로 한 것인데, 좀 봐 주시면 안 되는가?
아니, 봐 주시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막으셔야 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면, 하나님께서도 웃으며 넘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고,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곧 구원 진리의 근본에 관한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충격요법을 사용하셔서, 이 문제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의 선의와 충정으로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다윗이 아니라 다윗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인간의 선의와 열심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가르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과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오직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주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다윗은 베레스 웃사의 사건을 통해 이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받아들였습니다.
13:11절에서는 ‘웃사를 충돌하셨다’(파라츠 브우짜)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 지명을 ‘베레스 웃사’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다윗이 스스로의 입으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다’(파라츠 바누)고 말합니다.
(16-28절)
규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에도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였지만(13:8), 이번처럼 참된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에 대한 순종은 단순히 제대로 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겸비한 자기 부인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순종으로 얻는 즐거움은 우리 안에 주인으로 계시는 성령님께서 기뻐하심에서 오는 온전한 즐거움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탄식하고 계시는데, 그에 따라 우리 영도 탄식하고 있는데,
우리 육신만 즐거워하는 기쁨은 반의 반쪽짜리 기쁨입니다.
(29절)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는 바보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광채는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습니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러나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 곧 나의 종 됨을 자랑하고 즐거워합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의 궤 앞에서 낮은 자, 천한 자의 모습을 자처하였습니다.
[고후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그리스도의 주 되심, 나의 종 됨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그 길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충돌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세상의 풍조에 물들어
너무도 중요한 문제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며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종으로 자처하는 마음 확실하게 해 주십시오.
종 됨을 즐거워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