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본문 : 역대상 21장 18-30절
다윗의 인구조사로 유발된 전염병으로 이스라엘 백성 7만명이 사망하였다.
다윗의 회개에 하나님이 징계를 거두신다.
그리고 갓을 통해 번제단을 쌓으라 명하신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금 육백 세겔에 매입하여
번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신다.
모세가 지은 여호와의 성막과 번제단은 기브온에 있었지만 천사의 칼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오르단의 타작마당에 만든 번제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오르단에게 타작마당의 댓가로 지불한 돈이 엄청나다.
금 6백 세겔, 현제 시세로 환산하면 1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엄청난 희생의 댓가이다. 그 죽은 자들을 위한 희생의 댓가인가? 7만 명의 목숨값이다.
6은 불완전한 수이다. 그러나 백은 10x10으로 완전수이다.
인간으로 지불하는 죄값으로 최선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번의 실수와 범죄로 엄청난 희생과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윗처럼 회개의 자리에 엄청난 댓가 지불도 없이 나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심 때문에 가능한 이 회개의 자리, 용서의 자리, 구원의 자리에 값 없이 나아간다.
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엄청난 댓가 지불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값 없이 주신 이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나아가 회개할 때 주어진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불, 하나님의 임재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한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진실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 없이, 죄 용서 없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히 내주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고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바울처럼 날마다 죽고 또 죽어야만 산다.
십자가에 나의 생각과 감정, 자존심, 야망, 기대, 헛되고 죄악된 것들을 다 못 박아야 한다.
성령이 우리를 통치하시고 지배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주권을 내어드려야만 한다.
새벽 뜨거운 눈물로 회개한다.
나의 어떠함을 생각하고 이런 나를 구원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말씀과 기도만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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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제사와 하나님의 응답]
먼저 찾아오셔서 은혜의 방편을 마련해주신다.
다윗은 성막과 번제단이 있는 기브온 산당에서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지만,
죄로 인한 형벌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새로운 곳에서 제사드리게 하심으로,
죄를 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내가 멀어지더라도 하나님은 가까이 다가와 손 내밀고 계신다.
돌이키는 자의 예배를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다윗이 드린 번제와 화목제를 받으시고, 천사를 명하여 징계의 칼을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고 벌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시지만,
동시에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이들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죄를 사하시는 은혜로운 분이기도 하다.
먼저 손 내미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손을 잡기만 하면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처럼 기뻐하며 전치를 벌이신다(눅 15:22-24).
다윗이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재앙을 거두셨다.
성막에서 첫 제사를 드렸을 때처럼 여호와의 불이 제단 위에 내렸다.
이것은 다윗이 드린 제사에 대한 응답이면서,
성막 시대('옛적에')가 가고 성전 시대('이때에')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성전'은 재앙과 진노가 멈추고 회복과 화목이 시작되는 곳이며,
죄 사함과 기도의 응답이 이뤄지는 장소이다.
우리는 이 복을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리게 되었으며,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감사로 예배드림이 마땅하다.
오르난은 제사드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하지만,
다윗은 충분한 ('상당한') 값을 치렀다.
권력으로 남의 소유를 약탈하지 않고 이방인의 땅을 정당하게 구입함으로
이스라엘의 소유권을 확실히 하려는 의도이다.
하나님의 일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질서를 무시하고 헌신을 강요하면, 종교로 위장한 폭력이 될 뿐이다.
항상 먼저 찾아오시고 손 내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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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밑에서 드리는 번제 ]
다윗의 입에서,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십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이 제단은 값을 치르고 세워졌습니다. 기어코 값을 치르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을 치르고 우리의 성전이 되신
구속의 사건을 예표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윗은 오르난에게 피해를 주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행했지만,
결과적으로 피값을 치르고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성전 되심을 예표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이 가까이할 수 없는 성전이 기브온 산당의 성전이었다면,
참 용서의 성전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세워진 성전이었습니다.
이곳은 그 옛날 이삭을 대신하여 어린양이 번제물로 드려졌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두려워서 기브온 산당에 가지 못하던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자신의 번제가 응답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는 여호와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죄인이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전이 되시는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르난의 타작마당과 겹쳐지고 있습니다.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번제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천사를 명령하여 칼을 칼집에 꽂게 하십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번제가 드려짐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그쳤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우리에게 온전히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은 번제를 통해서입니다.
번제는 '자기 부인'의 믿음 고백을 상징합니다.
이 믿음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심으로써 번제는 완성됩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요 1:12).
주인으로 모시는 실제적인 행위는 주인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자기의 생각, 자기의 주장, 자기의 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을 다 비워 드리는, 남김 없이 태워 드리는 번제는 이런 믿음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번제를 오직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드려야 합니다.
그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유일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채워지는 것입니다.
채워지기 위해 비웁니다.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하고, 예수님의 영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에 의지하여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나의 말은 버리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의미 있고 유효한 번제입니다.
비우기만 하고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다른 엉뚱한 것들로 채워집니다.
[눅 11: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자기 부인 없이 예수님을 믿는다 할 수 없고,
자기 부인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엎드려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거기에서 완전한 용서와 화목이 선포됩니다.
주님, 매일 저녁의 기도가 성령의 불로 태워지는 번제가 되게 하옵소서.
매일 아침의 기도가 말씀으로 채워지는 번제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