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글 모음

호산나 전성시대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1. 8. 14. 10:12

재목을 이렇게 붙혀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재는 LEE Y.J 집사 부부와 저녁 식사를 했다.

내 회갑 기념으로 선물을 해줘서 보답으로 저녁을 같이했다.

 

대화 중에 많은 분량이 지난 호산나 찬양대 봉사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찬양대 대장을 하면서 찬양대 활동의 중심에 있던 시기이다.

말할 기회만 있으면 코이노니아를 외쳤던 젊은 40대 시절이다.

열정적인 사역을 펼치던 시기, 온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었던 때다.

호산나 찬양대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찬양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강조했고, 기도로 준비했으며 암보 하여 찬양했다.

스마트 폰이 없던 시기라 카세트 테이프, MP3, 가사를 적어 가면서 암보했다.

수십 번 부르고 또 불러었다.

암보를 위해 여러 번 부르고 가사를 암기하는 준비를 하면서

한 주간 내내 가사를 묵상하고 은혜를 받았으며

그 감동으로 예배 때 찬양을 올려 드렸다.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고 찬양대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으며

다른 봉사 기관에도 도전을 주었다.

찬양대는 대원이 100명 정도로 늘어났고 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예배의 소중한 한 부분을 잘 감당했다.

 

찬양 외에도 각종 대원들간의 교제에 노력을 하였고

각종 경조사에 많은 대원들이 함께 했다.

지역에 상관 없이 많은 대원들이 동참해 주었다.

예로 전남, 광주에서 내 큰 형님 장례상을 치를 때에도 저녁에 30-40명이 문상을 오셨었다.

작은 형님도 여의도 순복음 같은 분위기라고 칭찬하신 기억이 난다.

파트별 친목 도모와 파트 간 교제도 활성화 되었다.

여성 파트는 주로 매월 식사 교제로 가정이나 식당에서 만나 교제하였고

남자 파트도 식사 교제나 족구 등 운동으로 교제를 하였다.

족구에서는 늘 베이스가 이기다 보니 테너는 주중 특별 야간 훈련을 하기도 하는 등 

그러면서 파트별로 단합과 대원들의 교제는 한층 깊어져 갔다.

또한 교회 홈페이지의 호산나 카페를 통해서도 많은 교제를 하였다.

댓글 이어달리기  등등 ...

개인적으로 4-500편의 글을 썼고 2000개, 4000개 이상의 댓글 달기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었다.

연초의 1박 2일 찬양 세미나, 여름이면 1박 2일 수련회 등 교제에 거의 95% 이상 참석하는

뜨거운 관심과 참여와 교제의 시간들이었다.

여름이면 조우홍 집사님 열무 비닐 하우스에서 먹었던 보신탕 교제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집 집들이 때 아이 포함해 70명 넘게 참석했던 이야기 ..

매주 끊이지 않는 자발적인 간식 제공

..울산 시 유명한 떡집의 떡들은 다 먹어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간식의 제공자가 몇 주씩 대기하는 진풍경도 벌어졌었다.

삶을 나누는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맛보던 시기였다.

 

토요일 저녁 가족들과 함께하고 싶은데도 많은 분들이 연습에 참여했고

연습 후에는 간절한 중보기도 시간도 가졌다.

호산나 찬양대 중보기도에서 기도 응답을 많이 받아서

중보 기도 요청을 많이 하기도 했었다.

 

교회 절기 때에는 찬양대별로 칸타타를 준비했었다.

칸타타 준비를 위해 몇 달씩 연습을 하고 주중에도 2-3번씩 저녁에 모여

연습하고 10여 곡들을 암보하고 각종 안무와 복장 준비 등 ...

여집사님들은 직접 부산 시장에서 옷감을 사가지고 와서 재단을 하고 만들어 입기도 했고 ..

기도온과 300용사들을 부를 때는 횟불을 들고 큰 빈 항아리를 직접 깨뜨리기도 했었지..

기드온과 300 용사, 할렐루야 등 대곡도 다 암보하여 불렀으니 대단했다.

전문 찬양사역자 못지 않은 준비를 하였었다.

물론 성악 전공자 한 명도 없는 찬양대였지만 아마추어의 진수,

찬양에 대한 열정으로 그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 냈었다.

어떤 장로님은 수고하였다고 회식을 위해 백만원을 희사하시기도 했었다.

 

그 중심에 내가 있었고 함께했었다니 지금도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다들 어디서 그런 열정들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경험이 이후 해외선교위원회와 예배.안내부에서 안수집사로,

울산신정교회 시무 장로로 사역하는데 귀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아직도 그때 같이 사역하였던 분들은 그 시절을 회상하고 그리워한다.

신앙생활하면서 이렇게 즐겁게 사역한 적이 있었던가?하고 말이다.

테너의 정무안, 조우홍 집사님, 조상복 장로님, 이상원, 강민헌 집사님들을 중심으로

박상섭, 문성룡, 김도영, 이영, 심재준 집사님을 중심으로 한 베이스

정세련 권사님, 장금련, 이혜영, 정회영 집사 중심의 소프라노 

윤영숙권사, 강홍수, 박위숙 집사를 중심으로 한 알토 들 ..

주로 40대와 50대가 중심인 찬양대였다.

남자들은 형님들이 있었고, 여성 파트에도 누님들이 계셨다.

이 또한 찬양대의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데도 한 몫 하였다.

지위자 김 태웅 장로와 부인 박위숙 권사의 열심도 한 몫 하였고 빼놓을 수 없다.

열심히  반주를 해주던 청년들과 반주자들 ...

그리운 열굴들이 많다.

다시 만나도 반갑고 그리운 사람들이고 시절이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역하게 만들었을까?

중요한 원인들을 생각해본다.

 

첫째. 리더의 역활이다.

열정적으로 찬양대를 이끌어가는 헌신적인 리더가 필요하다.

솔선수범하며 찬양대를 이끌고 ,

지휘자와 역활 분담을 잘하여 협조하여야 한다.

지휘자는 곡을 선곡하고 연습과 훈련을 잘 감당하는데 전념하고

대장은 찬양대원들의 교제와 참여, 각종 행사의 진행을 잘 감당해야 한다.

서로 갈등을 빚으면 화합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하여 참여도가 떨어진다.

찬양대장과 지휘자가 쌍두마차가 되어 찬양대를 잘 이끌었다.

 

둘째. 구성원들의 역활이다.

모든 대원들이 다 대장이나 지휘자 마음 같지는 않다.

그럴 때 분위기가 중요하다.

최소 대원들의 10-20% 가 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

관망적이거나 소극적인 대원들도 따라오고 참여하게 된다.

전체 분위가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이들도 참여하는 것을 본다.

그런 분위기가 유지되면 왠만한 일들은 잘 운영될 수 있었다.

한 예로 암보 찬양을 몇 년 하고 난 뒤 매주 암보하기 힘드니 그만 하자고 한 의견들이 올라 왔었다.

그러나 몇몇 열성 대원들이 그 목소리를 잠재워 버렸다.

그래서 찬양대를 나오기 까지 10년 이상을 암보 찬양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암보 찬양이 힘들다고 입단을 꺼려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암보 찬양은 호산나 찬야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었다.

 

셋째. 기도

찬양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믿음이 뒤따라야 하고 기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음악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던 시절이다.

그래야 부르는 자나 듣는 자나 감동과 감격이 있다.

찬양대는 단순한 합창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의 은혜

한마디로 오합지졸 이었다.

찬송가도 4부로 부르지도 못하던 찬양대의 첫 모습을 생각하면 그렇다.

나 또한 처음으로 찬양대 봉사였고 대부분 대원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실력이 늘고

찬양의 열정을 갖게 되고 열심히 노력하여

과장을 하면 찬양대의 황금기 같은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당시의 호산나 찬양대 모습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