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내가 곤경에 처할 때 누가 도와주었던가?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2. 10. 18. 17:26

본문 : 사무엘하 1715-29

 

압살롬이 후새의 계책을 선택하고 아히도벨의 훌륭한 전략을 버린다.

이에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그리고 이들은 한 여인을 통해

젊은 전령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통해 요단 나루터에 기다리고 있는 다윗 왕에게

왕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첩보 작전이 진행된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 왕과 일행은 새벽까지 신속하게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을 향한다.

이 직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이 첩보 작전이 발각되자 에느로겔 지역의 무명의 한 여인이 기지를 발휘하여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숨겨주고 추격자를 따돌리는 도움을 베풀어 위기를 모면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탐할 때 파송한 정탐 군들을 숨겨준 기생 라합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만약 이 여인의 도움이 없어 두 젊은이가 잡혀서 중요한 정보가 신속히 전달되지 못하였다면

다윗과 그 무리는 몰살되었을 것이다.

한 명의 이름 없는 여인의 기지가 다윗 일행에게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작은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크게 역사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오늘도 나에게 맡겨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권 탈취의 진행이 자신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자

천하의 전략가인 아히도벨은 향후 벌어질 상황과 미래를 예측하고

압살롬이 전쟁에서 패할 것과 다윗이 승리하면 자신은 처형될 것이 명확하기에

낙향하여 주변을 정리하고 자살하고 만다.

인간이 어느 편에 서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도 그 재능이 악한 일에 사용된다면 무슨 유익과 가치가 있겠는가?

아히도벨도 압살롬의 요청을 뿌리쳐야 했었는데

나이든 왕 보다 떠오르는 신흥세력, 압살롬에게 가담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고 보았던 것일까?

어찌되었던 정의와 공의를 택하기보다 자기능력을 펼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판단한 것이 죽음을 자초하고 말았다.

압살롬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천하의 전략가를 잃고

결국 전쟁에 실패하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했다.

 

압살롬은 요압의 조카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마하나임에 있는 다윗 왕을 추격한다.

 

모압 지역의 지역 유지들이 다윗 왕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전쟁 물자들을 가지고 나와

그들을 지원한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위해 전쟁을 하고 풍요와 평안하게 살게 해준 왕을 죽이려고 나아가고,

자신들의 나라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는

지배국의 왕을 돕기 위해 전쟁 물자를 가지고 그를 위로하고 지원하기 위해 나아오는 상황이다.

평상 시 다윗 왕이 이 지역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다.

 

사람이 어려움을 만날 때 자기 주위에 도와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다윗왕의 최대의 위기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다.

상황은 불리하고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생명의 위험도 따를 수 있는 형국인데

오히려 다윗왕을 위해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고 함께 동행하며 또한 앞서 나아가 죽음을 무릎쓰고 싸운다.

이런 모습은 지난 날의 다윗의 삶과 무관치 않다.

평상시 자신이 어떻게 살았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고 베풀며 살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다.

만약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 나를 도와주고 함께할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남은 인생도 더 베풀며 살아야겠다.

인덕이란 저절로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평소 자신이 베풀 덕의 결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