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지혜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2. 12. 9. 11:49

사람은 태어나서 부터 죽을 때까지 끝없이 배운다.

살아가는 지식과 지혜를 배운다.

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지혜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런데 지혜의 근본은 무엇인가?

무엇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인가?

 

 

매일성경 ----- (송민원 교수의 글에서 발췌)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 전체가 모두 지혜에 대한 이야기이다.

십계명을 대표되는 모세오경,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서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사무엘, 열왕기, 역사서들 ,

모두가 지혜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성경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간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더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들을 지혜서라고 부른다. 

 

* 지혜의 두 종류

규범적 지혜( Standard wisdom) 와 반성적 지혜( Speculative Wisdom)

 

규범적 지혜란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범, 즉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이 되면 어두워지고, 봄,여름,가을,겨울 같으 계절의 변화가 있고,

먹을 것이 풍성한 계절이 있으면 춥고 배고픈 시절이 오는 것 등의 '페턴'이다. 

이 패턴을 잘 알고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이 패턴을 모르거나 알고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무지하고 아둔한 사람이다.

잠언이 이런 규범적 지혜를 설명하는 책이다.

이 패턴의 중심에는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규범이 자리잡고 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심으면 팥 난다는 것'처럼,

좋은 것(선)을 심으면 그 열매도 선할 것이고, 악한 것을 뿌리면 그 결과는 나쁠 수밖에 없다.

 

반성적 지혜는 패턴에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거나,

혹은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패턴을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바라본다.

대부분의 경우 규범적 패턴이 적용되지만,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패턴에 어긋나는 예외도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욥처럼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도 불행과 고난이 닥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욥기의 반성적 지혜다.

하나님은 주시기도 거두시기도 하고, 복을 주시기도 하고 화를 주시기도 하는 분이라는 욥의 말은 (욥 2:10)

하나님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를 초월한 분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전도서가 이에 속한다. 

 

전도서는 규범적 지혜를 몇 가지 전제들을 반성적 시각으로 되집어 본다.

첫째, 규범적 지혜가 규정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주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과 죽음, 건강과 질병을 등을 좋고 나쁨으로 볼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인간의 유한성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패턴은 영원하지만, 아주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은 그 패턴을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 전도서가 대화 상대로 상정하는 규범적 지혜

잠언

① 창조세계의 지배적인 원리로서의 인과응보 사상을 그기반으로 한다는 점

② 선과 악의 기준과 그 사이의 경계선이 명확하다는 점

③ 하나님께서 정하신 패턴을 인간이 (쉽지는 않지만) 알 수 있다고 말한다는 점

전도서

① 재물과 부요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

② 잠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대해 전도서사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전도서의 '가상적 독자'는 우선 규범적 지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이 규범적 지혜는 잠언이 아닌, 개인주의화 되고 세속화된 형태의 기복신앙 혹은 번영신학에 가깝다.

지혜가 제시하는 규범을 잘 따르면 자동적으로 생명과 장수, 재물과 자녀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신앙이다. 

전도서의 잠재적 독자는 스스로를 이러한 규범을 잘 알고 따르는 의인/지혜자로 여기거나,

그러한 지혜를 얻어 지혜자가 되기 위해(그리하여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1)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의 신학적 전제

두 지혜 사이의 비교 대상

① 하나님의 절대주권

② 하나님의 절대선

③ 하나님의 규범에 대한 인간의 인식 가능성

 

잠언과 전도서 모두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범대로 운행된다는 절대주권 개념을 전제로 한다.

다만 잠언은 그 규범을 '뿌린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 원라로 한정하여 설명한다.

이 인과응보 원리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선과 악 사이의 명확한 경계선이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사신 규범을 말씀(성경), 자연의 법칙, 선조들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규범을 아는 것이 지혜고,

규범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그 규범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은 무지(우매)이고 교만이다.

그러나 전도서는 규범적 지혜의 '뿌린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다음과 같은 반성적 시각으로 다시 살펴본다.

 

첫째, 선에도 악이 있을 수 있고, 선하기만 하고 악한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둘째, 의인/지혜자도 악인/우매자도 모두 죽음이라는 결말을 똑같이 맞이한다.

         (잠언과 같은 규범적 지혜는 의인/지혜자에게도 죽음이 임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셋째, 생명과 죽음, 질병과 회복 등은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 본다면 선악의 가치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

         아주 긴 시간의 관점으로 보면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넷째,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한 규범이 있지만,

         영원에 비해 극히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은 그 규범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를 이해하는 핵심 단어'헤벨'이다.

'헤벨'에는 숨, 입김, 안개 같이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어원적 의미가 있다.

시편 62:9의 '입김'과 잠언 21:6의 '안개'가 모두 '헤벨'을 번역한 것이다.

성경인물 중에서 '아벨'의 히브리어 이름이 바로 '헤벨'이다. 

'헛되다', '무의미하다', '쓸모없다' 등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부차적인 파생의미다.

즉 1차적인 의미는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고,

2차적인 의미는 '잠깐 존재하는 것은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라는 가치판단을 추가한 것이다.

그러나 잠간 있다 사라지는 모든 것이 곧 무의미하고 헛된 것은 아니다. 입김이나 안개가 무의미하고 헛된 것은 아니다.

아벨은 비록 성경에 잠간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의 인생에 허무하고 무의하다는 가치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이 '허벨'이라는 단어가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가 규정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시간이 영원(히. 올람)에 비하면 한 사람의 생명은 마치 김이 서렸다 사라지고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간이 크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규범(패턴)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규범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지혜자라 할 수 없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들 역시 아주 긴 시간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관점, 즉 무한히 긴 시간(올람)의 관점에서는 지혜자나 우매자나 차이가 없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인간과 동물도 별 차이가 없다.

 

(2)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 : 무엇이 지혜인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잠시 스쳐지나가는 존재(허벨)인 인간의 한계성을 바탕으로,

전도서는 하나님의 영원(올람)한 규범(패턴)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전도서의 대안적/반성적 지혜가 제시된다.

 

첫째, 패턴을 예측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오히려 아둔한 것이다. 

규범을 알고 패턴을 예측하여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규범적 지혜의 핵심이지만,

전도서의 관점에서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인과응보의 원리로 예측하는 것은 오히려 무지/우매한 일이 된다.

 

둘째, 모든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해서 미래를 대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아예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라고 가르친다.

악인/우매자에게만 죽음, 고통, 질병이 온다는 규범적 지혜와는 다르게,

전도서는 누구에게나 불행이나 질병, 고난이 찾아올 수 있다고 말한다.

패턴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고난이 언제 찾아올지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언제든지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여러 가능성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지혜다. 

 

셋째, 인생이 길지 않다는 것,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존재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지혜다.

'헤벨'은 전도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어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인생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지혜이기기 때문에

지혜자의 마음은 잔칫집이 아니라 초상집을 향해 있다.

 

넷째, 지금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지혜다.

규범적 지혜는 과거로부터 패턴을 배우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고 하지만,

전도서는 금세 사라지는 입김과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생을 살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래에 촛점을 맞춰 살아가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재에 주어진 일에 만족하면서 옆에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지혜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규범적 지혜가 간과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가치를 되살린다.

 

 

* 현대적 적용 : 반성적 지혜가 주는 신앙적 유익

규범적 지혜의 선악 가치관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도 신앙인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피조물로서의 우리 자신의 한계성,

겸손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가져야 할 타인과 주변에 대한 자세에 대해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첫째, 전도서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주의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한다.

내게 좋은 일이 하나님께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으며, 내게 나쁜 일이 곧 하나님께도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내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다.

나의 개인의 삶에 안 좋고 불행한 일이 닥친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각각의 때에 알맞고 적절하게 (아름답게) 행하시는 분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이 내 자신에게 있지 않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긴 호흡으로 역사 속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게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 한정된 근시안적인 신앙관이 아니라,

천지창조로부터 이어지는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거시적 안목을 제공한다.

 

둘째, 전도서는 '인간중심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한다.

성경 속에는 인간의 가치를 다른 피조물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는 구절들이 많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다른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음받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이해 역시 공존한다.

전도서의 인간관은 하나님 창조세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헤벨)라는 점에서 동물과 차이가 없음을 강조한다.

반성적 지혜는 창조세계의 주인이자 주인공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셋째, 전도서는 '교만'과 '겸손',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재해석한다.

규범적 지혜는 하나님이 패턴을 만드셨기 대문에 그 패턴을 깨달으려 애쓰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자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라고 말한다,.

반면,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인간이 하나님의 패턴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 두려운 분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잠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자 그분 앞에서의 겸손이라고 말하는 반면에

전도서는 '하나님을 알 수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규범적 지혜의 '겸손'이 반성적 지혜에서 '교만'이 된다.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하지만, 

전도서의 지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자신의 작음을 아는 것이 성숙한 신앙의 출발범이다. 

 

 

잠언도 성경의 지혜서이고, 전도서도 성경의 지혜서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지만,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며,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란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방침을 아는 능력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잠언 9:10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존경)할 때 신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신뢰한 결과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해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