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박사
마태는 아기 예수의 탄생 후 첫 경배자로 방 박사들을 소개한다.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예수의 탄생은 한 나라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열방의 왕으로 오셨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헤롯 왕은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겠느냐'고 묻는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관측하고 집을 나선 때는 얼마나 되었을까?
동방에서 낙타를 타고 이동했다면 수 개월은 되었을 터인데
아기 예수가 태어나고 별이 보였을까, 아니면 태어나기 전 부터 나타났을까?
그렇다면 출생 후 수 개월이 지나 알현을 한 것인가?
박사들은 왜 끝까지 별을 쫓아가지 않았을까?
중간에 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왕의 후손은 왕궁에서 태어날 것으로 생각하여 별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왕궁으로 직행한 것일까?
아기의 탄생을 왕의 탄생으로 생각한 것은 별의 특성 때문일까?
별을 연구한 그들이기에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왕을 알현하기 위해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준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기 예수를 보고 꿈에서 지시함을 받고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간 후에 그들의 삶과 생각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예수를 보고 믿은 최초의 이방인 아닌가?
여러가지 질문들이 머리 속에서 멤돈다.
누구는 왕을 알현하고 경배하며 예물을 드리기 위해 찾고
누구는 아기를 죽이기 위해 조사를 하고 음모를 꾸미며 찾는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왜 나를 찾느냐?
나의 아성을 쌓기 위해?, 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내려놓고 내어드리기 위해서인가?
역사를 바꾸고 새 시대를 열어갈 아기 예수는 세상의 중심에서가 아니라
변방에서, (미가 5:2) 선지자들이 예언한 작은 마을 베들레헴 유브라다에서 태어나셨다.
우리는 성공과 출세를 위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서울로, 강남으로, 도시로 향한다.
내 시선과 삶의 방향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어디에' 사는지 보다 더 중요한 물음은 '어디에 마음을 두며' 사는지 이다.
왕이 나셨다는 예언의 실현 앞에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한다.
실현된 예언 앞에서 기뻐하며 환대하기 보다는 긴장과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왕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거북하고 불편한 소식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늘 긴장과 갈등이 생기는 까닭은
그만큼 복음이 우리에게 철저한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날 지
분명한 지시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동방 박사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오랜 묵상으로 쌍은 내 지식도 주님을 향해 단 한 걸음도 옮기지 않는 냉담한 지식은 아니가?
성경에는 해박하면서도 여전히 아집과 아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가?
앎과 실천의 명제 아래에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
우리는 늘 앎에서 결단으로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에서 중단되고 머뭇거릴 때가 많다.
오늘도 작은 일부터 익숙해지도록 습관이 되도록 노력하자.
주님이 오늘 나에게 왜 나를 찾느냐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할까?
날마다 주님을 찾고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분명히 답할 준비를 해야겠다.
수많은 청구서인가?, 부탁인가? 사랑의 연애편지인가?
오랜만에 설 연휴라 서재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유익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