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2

묵상과 해석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3. 7. 24. 12:10

저자 : 정성국

추판사 : 성서유니온

책 소개

2016년부터 2년간 「매일성경」에 연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정성국 교수의 “큐티를 위한 해석학적 변명”

적지 않은 사람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내가 혹시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닐까?’ 되돌아본다. 나중에야 그것이 본문의 원래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때의 묵상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사람도 적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글들이 시작되었다. 정성국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대중들의 큐티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해석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대중들이 고민하는 해석과 묵상이 왜 일어나는지, ‘그릇된’ 해석 뒤에도 의미 있는 묵상이 가능한지 등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성경 해석의 기술적인 부분들을 다루면서 해석과 묵상의 이상을 제시하는 책은 있지만, 우리의 묵상 중에 실제로 일어나는 해석 현상들을 설명하는 책이 드물었다. 이 책은 묵상의 방법보다 방향에 대해 씨름하게 만들고, 더 깊은 묵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개인의 묵상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해석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기에, 깊이 있는 묵상, 해석학적으로 바른 묵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책일 것이다.
 
출판사 서평
말씀과 삶은 묵상을 통해 해석된다!

“성경 읽기와 삶 읽기가 만나는 곳이 말씀 묵상이다. 말씀 묵상은 ‘성경’을 통해 ‘우리 삶’을 읽어 내는 경건 활동이다. 말씀은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삶은 묵상을 통해 해석된다. 묵상을 통해 반추되지 않은 삶은 해석되지 않은 채 남는다. 자칫 잊힐 수도 있었던 지난 삶은 말씀이 부여해 준 의미 때문에 지금도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삶에서 많은 의미를 읽어 내는 사람이 더 풍성하게 산다. 묵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_들어가는 글 중에서

이 책은 “큐티를 위한 해석학적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매일성경」에 2년간 연재한 글들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내가 혹시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고, 나중에야 그것이 본문의 원래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때의 묵상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 연재가 시작되었다. 정성국 교수는 이 연재를 통해 대중들의 큐티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해석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작업을 하면서, 그런 해석과 묵상이 왜 일어나는지, ‘그릇된’ 해석 뒤에도 의미 있는 묵상이 가능한지 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찾아보면 우리 주변에 성경 해석의 기술적인 부분들을 다루면서 해석과 묵상의 이상을 제시하는 책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묵상 중에 실제로 일어나는 해석 현상들을 설명하는 책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정성국 교수의 글은 연재를 거듭하면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묵상의 방법보다 방향에 대해 씨름하게 만들고, 더 깊은 묵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묵상이 그저 머릿속 사고에 그치지 않고 삶으로 이어지도록 이끈다. 더 나아가 개인의 묵상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해석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해 준다. 부록에서 소개하는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성경 읽기도 우리에게 선물 같은 내용이다. 정성국 교수의 『묵상과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내고 나의 삶을 읽어 내는 묵상,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 안에서 다시 살아가게 하는 묵상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는 책이다. 이 초대에 응하는 독자들에게서 묵상이 풍성해졌고 그 묵상으로 인해 삶이 풍성해졌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책 속으로

필자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큐티의 잘못된 동기들을 분명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룰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일반 성도들의 비전문가적인 성경 해석을 말씀을 훼손하는 행위로 폄하하기만 하는 소위 ‘해석 전문가 집단의 엘리트주의’ 또한 배격한다. 이는 성경을 대중의 손에서 빼앗아 다시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전락시키는 더 큰 폐단을 낳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1. 우리의 말씀 묵상, 어디에서 길을 잃었나?」 중에서

예수님이 뒤집어 놓으신 것은 성경을 보는 눈만이 아니다.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해석학적 혁명은 신약 해석 공동체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연쇄적 변화들을 초래하였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도, 세상도, 역사도, 공동체도,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의 성취자라고 인식하자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한 역사 이해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나라의 시간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 「3. 예수님의 성경 해석, 핵심은 방법인가 준거점인가?」 중에서

여전히 근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아직 전근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 부류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전근대에 해당하는 지적 틀이 더 편안하다. 시골 교회의 연로한 권사님들에게 근대의 산물인 역사-문법적 방법을 가르치고 역사적 저자의 의도를 강조하면 말씀 교육 본연의 목적을 잃어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해석학적 배려를 준비해야 한다. 적어도 해석 방법론에 있어서는 그렇다. 그러나 연로한 권사님들이든, 많이 배운 지성인들이든, 기복신앙적인 묵상은 허용될 수 없다. 처음부터 묵상의 틀이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에 붙잡힌 묵상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의 뼈대가 되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묵상의 틀을 다시 놓아야 한다. 이것이 2천 년 성경 해석사 전체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해석학적 교훈이다.
--- 「6. 종교개혁에서 현대까지, 의미의 문제는 해결되었나?」 중에서

나치 정권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를 갈구한 본회퍼나, 군사 독재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를 염원한 문익환 목사에게도 동일한 긴장과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어두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살아가는 동일한 환희와 소망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종말적 삶을 살기 위해, 함께 그 긴장을 감내하며 기다림 속에서 연대할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이미 여기에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축하할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신앙 공동체는 종말 공동체여야 한다. 성경은 바로 이 종말적 공동체의 삶을 위한 안내서로 의도되었다. 그러한 공동체가 있다면, 종말적 삶이라는 광대한 틀 안에서 묵상자들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의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윤리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 「11.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묵상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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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서문
들어가는 말: 묵상, 문제는 ‘해석’이다!

1부 묵상과 해석, 그 만남과 긴장
1. 우리의 말씀 묵상, 어디에서 길을 잃었나?
2. 성경 해석, 어떤 긴장을 요하는가?

2부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묵상과 해석의 출발점
3. 예수님의 성경 해석, 핵심은 방법인가 준거점인가?
4. 신약성경 저자들의 말씀 묵상, 그 동기와 자세는 무엇인가?

3부 선인들의 성경 사용법
5.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성경 해석은 열등한 것인가?
6. 종교개혁에서 현대까지, 의미의 문제는 해결되었나?

4부 말씀 묵상의 역동성과 믿음의 상상력
7. 말씀 묵상 속, 왜 이리 많은 일들이 일어날까?
8. 말씀 묵상 중, 비유적 해석은 어디까지 허용되나?

5부 신약성경 저자들과 다시 놓는 묵상의 이야기 프레임
9.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묵상하기1
10.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야기로 묵상하기2
11. 지금 여기에 임한 미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묵상하기
12.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로 묵상하기

6부 함께 세워가야 할 해석 공동체의 묵상 문화
13. 지속 가능한 해석 공동체인가?
14. 말씀 묵상, 어떻게 더 깊이 들어갈 것인가?

나가는 말: ‘예수 이야기’ 프레임과 말씀의 식탁
부록.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었나?
 


우선 성경에서 '해석'이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자.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이 형제들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요셉의 첫 등장에서 성경은 분명히 말했다. 형제들이 미워하여 요셉을 노예로 팔았다고. 과연 요셉은 '형제들이 미워해서 팔린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획하여 이집트로 미리 보낸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둘 다 맞지만, '동일하게 성숙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라는 더 큰 텍스트(15)'를 요셉이 가져올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거쳤기 때문(14)'이다.

따라서 해석의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목적이다(69). 바울의 원자화된 해석('자손' 자체가 집합명사인데 '자손들'이라고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 본 회퍼의 성경말씀에 대한 주관적 해석('겨울에 오라'는 디모데서의 일부를 '히틀러암살단 조직'으로 받아들인 것) 등은 엄밀히 말하면 객관적 해석에선 벗어난 해석이다. 하지만 해석의 준거틀hermeneutical reference-frame이라는 커다란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확신과 주시요 그리스도이신 그 예수님에게 이제 그들의 삶 전부를 드릴 수밖에 없다(70)'는 관점에서는 바른 해석이다.

예수님 역시 모든 성경이 자신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선포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해석의 준거점은 곧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QT 또한 실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 알레고리. 알레고리는 쉽게 말해 플라톤의 이데아(존재자 너머에 존재가 있다) 철학에 기반한 해석방법으로, 문자를 통해 숨겨진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예컨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라합이 붉은 줄을 내려놓음으로서 학살에서 피한 일화를 '주님의 보혈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은 (알레고리 해석의 전문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다. 그의 독창성과 창의력(?)에 놀람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우선 성경에서 '해석'이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자.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이 형제들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요셉의 첫 등장에서 성경은 분명히 말했다. 형제들이 미워하여 요셉을 노예로 팔았다고. 과연 요셉은 '형제들이 미워해서 팔린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획하여 이집트로 미리 보낸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둘 다 맞지만, '동일하게 성숙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라는 더 큰 텍스트(15)'를 요셉이 가져올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거쳤기 때문(14)'이다.

 

따라서 해석의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목적이다(69). 바울의 원자화된 해석('자손' 자체가 집합명사인데 '자손들'이라고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 본 회퍼의 성경말씀에 대한 주관적 해석('겨울에 오라'는 디모데서의 일부를 '히틀러암살단 조직'으로 받아들인 것) 등은 엄밀히 말하면 객관적 해석에선 벗어난 해석이다. 하지만 해석의 준거틀hermeneutical reference-frame이라는 커다란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확신과 주시요 그리스도이신 그 예수님에게 이제 그들의 삶 전부를 드릴 수밖에 없다(70)'는 관점에서는 바른 해석이다.

 

예수님 역시 모든 성경이 자신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선포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해석의 준거점은 곧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QT 또한 실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알레고리다. 알레고리는 쉽게 말해 플라톤의 이데아(존재자 너머에 존재가 있다) 철학에 기반한 해석방법으로, 문자를 통해 숨겨진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예컨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라합이 붉은 줄을 내려놓음으로서 학살에서 피한 일화를 '주님의 보혈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은 (알레고리 해석의 전문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다. 그의 독창성과 창의력(?)에 놀람을 금치 않을 수 없다.

마태복음 10:16에서 예수님은 "뱀처럼 지혜로우라"라고 말씀하셨다. 뱀이 공격을 받으면 자신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온 몸을 노출시키는 것처럼, 교회도 그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온 몸을 희생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아가 뱀이 허물을 벗고 새 힘을 얻는 것처럼, 성도도 옛 사람을 벗을 때 새 힘을 얻게 된다. (104)

종교개혁의 주장인 루터와 칼뱅도 알레고리적 해석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교황과 사제의 독점적 해석이었다. 그들은 '오직 성경' 원칙에 의거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차용했고, 구약에서 여전히 그리스도와 복음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렇다면 알레고리적 해석의 준거틀이 되는 프레임들은 무엇이 있을까? <묵상과 해석>은 성경이 이야기로 쓰였으며, 이야기를 해석하는 프레임이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프레임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묵상하기

2.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야기로 묵상하기

3. 지금 여기에 임한 미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묵상하기

4.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로 묵상하기

 

이는 기독교 짬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만한 프레임이다. 첫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주 되신 예수님의 복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셋째는 천국-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으로, 넷째는 교회를 세우고 일구어 가는 신앙 공동체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로 쓰였기 때문에, 이 관점들은 각 이야기에 맞춰 무궁무진하게 변주·활용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 적합하다면 나의 QT 역시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프레임을 통해 말씀과 삶을 읽어야 한다. 개인의 성공 프레임으로 읽을 때 요셉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자수성가 이야기다. 이 틀은 소수의 사람을 영웅으로 우러러 보게 하는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을 '루저'(낙오자)로 만든다. (중략) 요셉 이야기는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성취해 가시는 이야기' 프레임에서 읽어야 한다. 요셉의 성숙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형들의 미움과 증오, 야곱 집안 전체의 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요셉을 모함하는 애굽 사람들의 모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회복하고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목적을 변함없이 진행해 나가신다.(308)"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읽고 해석해야 한다. 세상이 흔히 말하는 성공학, 경영학, 인문학 등의 방법으로 읽는 것은 '00학에서 말하는 성경'이지 올바른 성경 해석이나 말씀 묵상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가 되지 않을 뿐더러 자칫 성경을 세상에 구겨넣으려는 어리석은 시도가 될 수 있다. <묵상과 해석>은 묵상과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올바른 해석의 '준거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