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영성일기

생명의 길, 사망의 길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3. 8. 16. 09:06

본문 : 예레미야 21장 1-4절

 

드디어 바벨론 군대가 처들와 오자 그제사 시드기야 왕은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낸다.

성전불패 신학에 무장된 그들은 아직도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중보하여 구원의 대책, 신탁을 구하는 요청을 하러 온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분노, 대노의 심판은 변경될 수가 없었다.

이미 엎드려진 물이다.

유다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심판 뿐이고 ,

하나님이 예비하신 수술대에 오르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들 앞에 두 갈레 길이 놓여 있다.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다. 

이 표현은 본래는 언약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심판의 결과로 성안에서 전염병과 기근과 칼에 죽느냐

항복하고 포로가 잡혀가 생명을 구제하느냐의 선택 밖에는 없는 상황이다.  

사망의 길은 구원과 승리를 외치는 거짓 예언에 속아,

예루살렘 성안에서 항전하다 어리석게 죽임당하는 것이고,

생명의 길은 성 밖으로 빠져나가 바벨론에게 투항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징계와 연단, 정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티끌만치도 가망 없는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항복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은혜로 보이는 기적도 일어날 것이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하나님이 얼굴을 들어 이스라엘에게 향하실 때는 축복의 의미였지만

이제는 화를 내리기 위함이다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예레미야는 몇 번이나 예언을 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을 전했을까?

당장 내 앞에 보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는 관심을 주지 않는다.

문제가 코 앞에 들이닥쳐야만이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고 대처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인생은 긴 것 같지만 짧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자신들이 다 세상 이치를 알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얼마나 교만한지 모르겠다. 

자기 고집과 아집에 싸여 남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모습은 찾아 보기가 갈수록 힘들어 보인다.

우리 속담에'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입을 열어 말하기 보다, 귀를 열어 들어주는 모습이 더 지혜롭고 성숙한 모습이다.

자기가 아는 작은 몇 가지를 자랑하며 떠벌리며 열을 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오묘함과 신비함과 무궁무진한 지혜에 탄복하며

오늘도 조용히 귀 기울이며 깨닫아 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부부 관계도 그렇다. 

자기들은 잘 살고 있다고, 우리 가정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좋은 부부나 행복한 가정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그럴 때가 많다.

자신들의 문제점을 깨닫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알아야 고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자기 세계에 갇혀 살아간다. 

우리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을 대할 때마다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더 좋은 방법이 있고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틀렸는데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는 고집스런 사람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오늘 나를 살리고 구원할 길, 선택은 무엇일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다.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구원자 섬기며 살아가는 일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이 생명의 길 되시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이 요동하지 않고 신실하게 지켜지며 살아가기를 

성령님께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