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영성일기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3. 10. 26. 09:26

본문 : 열왕기상 21장 1-10절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아합 왕이 여름 궁전 이스르엘에서 궁 밖을 바라다보니

자기 궁에 가까이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 좋아 보였나 보다.

그 포도원을 사서 자기 채소밭으로 사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봇에게 포도원을 매매하든지 아니면 더 좋은 포도원으로 교환하든지 요구한다.

그러나 나봇은 왕의 제의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다.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을 마음대로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율법을 지킨 결과는 너무나 처참했다.

포도원을 빼앗긴 정도가 아니라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나봇은 최고 권력자의 요구에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율법과 전통을 지켰다.

지난 역사 속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신앙을 지키다가 생명을 잃은 수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이런 당당함이 있는가?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율법을 모르지 않았을 아합이다.

이스라엘의 토지 제도는  조상의 유업을 제멋대로 거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토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시고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포도원'을 '채소밭'으로 바꾼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살핌을 상징하는 '포도원'을 

애굽의 노예 시절을 떠올리게하는 '채소밭'으로 바꾼다는 것 자체가

욕망에 눈이 멀어서 약속의 땅을 애굽화 하는 아합의 습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의 심판 선언에도 금식하지 않던 아합이

작은 포도원 하나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다윗이 보인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인간의 욕심이 사리판단을 못하게 만들고

무엇이 우선이고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크든 작든 욕심에 대한 나의 모습은 어떨까?

탐욕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은 탐욕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의 원죄가 탐심에서 시작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살아가면서 욕심을 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그 욕심으로 인한 결과를 기억해야 한다.  

남에게 피해가 가서는 안 된다. 아프게 해도 안 된다.

양심에 어긋날 정도의 욕심인가? 법을 어기는 욕심인가?  살펴야 한다.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난 어떻게 그 욕심을 통제하고 절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욕심을 버리는 일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던가?

내려놓음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움켜쥐는 것은 쉬워도 움켜진 손을 펴는 일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무나 다 하지 못하는 삶이기에 이런 삶을 사는 분들을  존경을 받는 것이다.

돌아보면 선교사들을 돕고, 선교지에서 아픈자들을 돌보는 삶이었다.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작은 나눔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내가 가진 것이 더 많다. 

많다는 것은 움켜쥐고 있는 것이 많다는 의미이고 욕심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모든 것까지  내어주시는 그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한다.

'큰 바위얼굴' 이야기처럼  주님을 닮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갈 뿐이다. 

힘든 비움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넘치게 채워질 때

내 안에 있는 탐욕과 욕심도 비워질 것이다. 

 

아합은 벤하닷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포도원에 대한 욕심으로 번민하고 갈등하며 괴로워한다.

그런 모습을 본 이세벨이 물어오자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은근히 그 문제를 이세벨이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세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권력을 휘둘러 나봇을 처단할  음모를 세우고 실행한다.

그나마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으로 망설이는 아합과는 대조적으로

과감하고 대범하게 두려움없이 일을 처리하는 냉혹한 여자의 모습이 무섭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생각과 삶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목표 실현만이, 목적 달성만이 보일 뿐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의 실체가 여실히 들어나는 모습이다.

이세벨은 율법을 두려워하는 아합을 위해, 율법을 제멋대로 이용한다.

내용은 하나님을 저주한 죄, 두 증인, 성읍 밖의 처형이다.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구만 채우는 일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 이것이 현대판 우상숭배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리석음과 죄악된 행동은 없을까? 

신앙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괴로워한 적은 없는가?

 

매사에 모든일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 보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그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말씀에 순종한다면 괴로움도 갈등도 없을 것이다.

어긋난 행동을 하고 싶기 때문에 번민하고 갈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