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서의 마지막
본문 : 욥기 42장 1-17절
드디어 욥기서 대장정을 마치료 한다.
욥의 이런 고백으로 시작한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하실 일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창조 질서와 자연계의 일들로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인정한다.
욥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들었던 것과
직접 눈으로 주를 뵙고 느끼기고 깨닫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귀로 들은 하나님, 눈으로 본 하나님 ...문득 이런 사자성어가 생각이 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인과율에 가두어 놓은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인가?
사람의 머리로 상상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을 아시고 계획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앞에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한 것일까?
그는 인정할 수빡에 없고 자신의 무지와 죄를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셨던 순간이다.
겸손히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깨닫은 것이리라.
인간의 교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에덴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다.
과학이 발달하여 모든 것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인간의 이성, 집단 지성이 모든 것의 답을 줄 수있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오만과 교만을 생각하게 한다.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교만이다.
오늘 본문에 자기를 그렇게 정죄하고 큰 숨겨둔 죄인 취급하던 친구들을 용서한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 것이 욥은 맞고 너희들은 잘못되었으니
일곱 수소와 일곱 마리 숫양으로 욥에게 나아가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욥이 그들을 향해 중보기도한다.
관계의 회복, 욥과 친구들의 긴 논쟁으로 병들고 고통 중에 있던 친구를 힘들게 했던 것이
깊이 관계에 금이 가고 회복할 수 없을만큼 갈라진 관계를 회복하게 하신다.
그런 친구들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중보 기도하는 욥의 의로움을 본다.
그러자 하나님이 욥을 기쁘게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욥과 하나님, 욥과 친구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자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돌아 보시고 모든 것들을 이전 보다 갑절이나 회복시켜 주신다.
성경은 7아들과 3딸을 언급하면서
아들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3 딸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오라비들 처럼 기업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녀 평등의 사상은 인류의 어떤 나라, 어떤 종교, 어떤 기록보다 앞선다.
---에브리데이 스터비 바이블에서 옮김.
이 책 곳곳에서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욥은 참으로 회개했다. 하지만 욥의 회개는 친구들이 요청하는 종류의 회개가 아니었다.
그는 은밀한 죄를 지은 것에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에 의문을 제기한 것에 용서를 구했다.
욥은 자신의 태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완전한 정의를 인정했다.
우리가 울분에 쌓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가?"라고 물을 때 죄를 짓게 된다.
시간 속에 갇힌 우리는 오늘 너머의 일을 볼 수 없기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이유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의심과 신뢰 가운데서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실지라도 그분을 신뢰하겠는가?
욥은 여호와께서 앞서 자신에게 하신 질문을 인용한다.
그는 공개적이고 정직하게 하나님과 대면했으며 자신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당신은 이해되지 않는 일을 핑겟거리로 내세워 당신의 신뢰가 부족함을 정당화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당신에게 없음을 인정하라.
진정한 믿음은 그런 겸손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틀렸다고 분명히 지적하셨다.
그분이 욥에게는 구체적인 죄를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경건하고 순종적인 삶을 살았다는 욥의 주장을 인정하셨음을 보여 준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어떤 큰 죄에서 비롯되었다고 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모른 채 욥을 판단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욥은 많은 비판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세 친구를 위해 기도했다.
당신에게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을 용서하기란 어렵지만 욥은 그렇게 했다.
당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가?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선하다고 인정하신 욥의 행동을 본받아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이 욥을 이전의 삶으로 회복시켜 주지 않았다면 욥기의 메시지는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무언가 버린 사람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8: 29-30)
우리에게 회복은 욥의 경우처럼 영적 회복과 물질적 회복 모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완전한 회복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언젠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정의롭고 은혜로우시다.
우리가 부당하게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면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실 것이다.
당신이 겪는 모든 시련 중에도 믿음을 굳게 붙들라.
그러면 하나님은 보상하실 것이다. 지금 받지 못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삶에서 받을 것이다.
욥기에 나오는 주요 질문은 시대를 초월한다.
왜 신자들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는가?
욥의 지혜로운 친구들은 오랜 논쟁을 하면서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심각한 실수를 꾸짖으셨다.
그들은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생긴다고 추론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질병이나 물질적 궁핍함이
고백하지 않은 죄나 불신앙의 표시라고 주장할 때 이 같은 실수를 한다.
하나님을 따를 때 대개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더 행복한 삶으로이어지고,
하나님께 반역할 때 (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삶으로 이어지지만,
우리 상황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죄에 물든 이 세상에서 재난과 고난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모두 닥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는데 무관심하거나 부주의하거나 부당하거나 무력하다는 뜻이 아니다.
타락한 세상에세 살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 죄의 비극적 결과를 당한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선을 위해 악을 되돌려 놓지만 잠시 악을 허용하신다.(롬 8:28)
우리는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는지에 답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분이 전능하시고 자신이 무엇을 하시는지 알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시련과 딜레마에 직면할 때 하나님께 시선을 돌려 힘을 얻는 기회로 여기라.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기를 열망하는 분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고통과 혼란과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승리를 얻고
삶에서 사탄의 가장 큰 발판인 의심을 잆앨 것이다.
하나님을 당신의 기초로 삼으라.
당신은 결코 그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