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내리는 눈
화사하게 피어 산과 들과 거리를 밝게 비추던 꽃들은 지고
연두빛 새싹들이 옷을 갈아 입는가 싶더니 벌써 온통 초록빛 세상이 되었다.
아침 거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뒷동산이나, 앞쪽 남산도 푸르고 푸르다.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이 생명의 약동을 노래하는 아침이다.
비온 뒤 청명한 푸른 하늘 아래 초록빛 세상이 펼쳐져 있다.
봄꽃들이 지는 것을 아쉬워 하듯
거리에는 하얀 눈이 내린다.
아직 절정은 아니지만 푸른 잎사귀들 위로 흰눈이 소복히 쌓인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가로수로 자리잡은 이팝나무 꽃이다.
외래 진료실 브라인드를 들어 올리면
하얀 눈내린 이팝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붉고 흰 철쭉이 지고, 떨어진 꽃은 잔디 위에 시들어 가는데
또 하얀 이팝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나를 즐겁게 한다.
세월은 이렇게 흘러간다.
앞으로 이 자리에서 몇 번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공식적으로 3번의 봄을 더 맞이할 수 있다.
은퇴를 생각하고 근무할 수 있는 시간을 계수하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은 월급날이다
은퇴할 때가지 45번의 월급을 수령할 수 있다.
아니 오늘 월급을 받으면 44번이 남는다.
많은 저축을 해둔 상황이 아니라 퇴직 연금과 개인연금을 헤아려 본다.
은퇴
'노인' 하면 떠오르는 모습 중에 하나가 백발이다.
그러고보니 저 이팝나무도 하얀 꽃이구나.
왜 이런 연상을 하는 것일까?
나이듦, 노년, 은퇴, 흰색으로 이어지는 연상은 분명 세월 탓이러니 생각한다.
하루 하루 소중함을 갖고 살아간다.
근무할 날이 많지 않고, 살아갈 날이 줄어듦이다.
최선을 다했노라고, 열심히 근무하고 환자들을 돌보았노라고 회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년의 시간을 마치는 날, 후회없이, 미련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련다.
어제 수요기도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대학 졸업 때 부모가 세계일주를 보내주었고, 세상을 새롭게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로 헌신하기 위하여 언어을 배우다가, 20대 꽃다운 젊은 나이에 죽어간
윌리엄 보든(1887-1913)의 성경책 뒷장에 씌어 있었다는 글귀
No reserve / 아낌없이
No retreat / 후퇴없이
No regreat / 후회없이
한 평생 사노라면 수많은 사연들과 희노애락을 경험한다.
1994년 5월~ 2027년 12월
한 직장에서 34년 가까운 세월을 근무하다가 은퇴할 것이다.
내 인생의 30대 중반에 시작하여 40대와 50대를 보내고 60대 중반에 마치는 직장 생활이다.
이 삶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어떤 의미를 줄까?
후한 점수를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박한 점수를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하리.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신앙생활 하면서 깨달은 것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적합하고 최선, 최고의 삶으로 인도해주셨다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음을
그래서 감사하다. 아니 감사할 것 밖에 없다.
물론 나의 죄와 허물, 실수 그리고 불신, 불순종의 모습들로 인하여
얼룩진 아픈 상처들이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감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자리까지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커피를 마시며 자판을 두들긴다.
회진을 마치고 영성 일기와 글을 쓰는 이 시간,
성경 묵상과 기독교 서적을 읽는 시간들,
점심 시간의 동천강변을 걷는 일,
걸으면서 쓰레기를 줍던 일,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찬송가를 들었다.
성경 말씀을 들었으며, 읽어주는 책을 듣으면서 걸었다.
진료에 지친 몸을 자연을 보면서 힐링을 하고,
사 계절 자연의 변화들을 오감으로 느끼는 소확행의 시간들이다.
일 주일에 두 차례 수술도 이젠 버거워하는 체력이다.
그래도 아직 수술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 일상을 부러워 할 때도 찾아 올 것이다.
모처럼 이팝나무로 인해 글을 쓴다.
은퇴, 인생, 보람, 감사의 단어들로 마무리하는 아침이다.
PA가 타 주는 커피가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