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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1차 전도여행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4. 5. 29. 10:43

본문 : 사도행전 13장 12-31

 

AD 46~48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이 시작된다.

 

시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실루기아로 내려가 배를 타고 구브로로 향한다.

살라미에 이르러 유대인의 열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고

온 섬을 지나 '바보'라는 수도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다.

바예수라는 마술사의 방해에 얼마 동안 맹인으로 만들고

지혜있는 사람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한 기사가 있다. 

 

이후에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도착했다.

동행했던 요한은 거기서 뒤돌아 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그곳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복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족장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출애굽과 광야 여정,

가나안 땅 정복과 사사들의 통치,사울을 세워 시작한 왕정까지의 역사를 진행하셨다.

그리고 다윗의 통치에서 희미하게 나타난 그 나라를,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선명하게 성취하셨다. 

이스라엘은 그를 몰라보고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고 구주가 되게 하셨다.

구원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이고, 그 예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자의 것이다. 

 

버가에 이르자 바울과 바바나를 돕던 요한(마가)이 선교를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풍토병으로 힘들어 돌아갔다고도 하고, 

타우루스 산을 넘어 행군하는 여정을 앞두고 지레 부담을 느끼고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버가와 비시디아 안디옥 사이에는 해발 최고 3,000m에 이르는 험산 산들로 이루어진

타우루스(혹은 토로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때 이 문제로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갈라서고 말았다.

그러나 바울은 인생 말엽에는 마가와 화해하고 동역했었다.

선교를 향한 열정도 좋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 합류하면 동역자들과 사역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선교에 대한 이해 없이 비전트립을 가면 현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것들을 경험한다.

선교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영적 전투의 최전선임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은 떠났지만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은 계속된다.

남부 갈라디아 고원 지역에서의 바을은 '육체의 약함'(갈 4:13)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이지만,

그는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고후 11:26) 타우루스 산을 넘어 버가에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비시디아 안디옥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한다.

이렇듯 성령은 우리를 꽃길로만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적인 연약함, 숱한 변수, 절망적인 환경과 기꺼이 맞서게 하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관문(게이트)을 통과하면 고향 다소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갔지만 

고향으로 가지 않고 오던 길을 되돌아서 돌아온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이방 지역이지만 유대인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는데, 바울은 안식일에 그곳을 찾는다.

바울이 랍비임을 알아본 회중들이 설교를 권하자 바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한다.

그는 복음을 전할 곳이면 어디든 가는 순종의 사람이다.

전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준비된 일꾼이엇다.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것은 바울과 달리 순종하지 못할 핑계가 많고, 삶의 중심에 복음을 두지 않아서가 아닐까?

 

지난 주일 선교 주일로 보냈다.

각자의 삶이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선교가 선교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말로만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선교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선교 결과물로 선교 성공 여부를 평가해서도 안 된다.

다닞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내고 기회가 되면 말로 전하며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이다. 

 

본격적인 바울 행전의 시작과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다.

처음 비전트립을 가던 때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매년 비전트립을 다니면서 경험했던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몽골, 키르기스스탄, 피지, 베트남 ....

어언 20여 년의세월이 흘렀다. 

올 해도 추석 연휴에 다녀오려고 한다.

선교사를 서원하였으나 장기 선교사로의 삶을 살지 못한 속죄의 마음으로 ...

평생 선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선교사적 삶을 살아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그래서 선교라는 단어는 나와 친숙한 단어이다.

오늘도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