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도의 고민
본문 : 사도행존 25장 13-27절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죄수 한 명을 인계 받는다.
부임 삼 일 후에 예수살렘에 가자 유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몇 사람이 바울을 고소한다.
그리고 바울으로 예루살렘에서 옮겨 재판 받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베스도는 다시 가이사랴로 내려가야 하고 필요하면 내려와 고소하라고 지시한다.
그들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내려와 고소하지만 로마인 총독의 입장에서 볼 때
특별한 범죄 사항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인 문제로만 보인다.
그런데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면서 재판은 중단되고 구속 상태로 있었다.
마침 아그립바 2세와 아그립바 1세의 장녀 베니게가 신임 총독을 예방한 것이다.
그러자 베스도가 자신의 고민거리인 바울 사건에 대하여 자문을 구한다.
자신이 보기에 특별한 범법 내용이 있는 범죄 사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소문을 쓰려고 하자 특별한 죄목이 없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보면 어떤 일들의 진행이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알게된다.
오늘 본문에 발생한 일, 아그립바와 베니게 그리고 베스도가 바울을 불러 자기들 앞에 세우지만
실상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그들을 불러 모은 신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우리 앞에 보내신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우리 몫이다.
이번 인증 조사기간에 최근 몇년 전에 사별한 목사 사모인 조 윤희선생을 만나게 하였고
김성호 선생에게 복음을 권하는 일이 있었다.
고구마 전도법에서 이야기하는 또 한 번의 찔러 봄이라고 할까?
외가쪽으로는 모두 기독교인들이고 목회자 들이며, 어릴 때 성경 학교도 다니고 성경도 읽었다고 한다.
친척들이 열심히 전도했지만 아직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소중한 만남이었다. 김 선생에게 복음을 전하고 믿음생활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조 선생하고는 신앙인들의 대화 속에 조금은 위로가 되엇기를 바란다.
또한 참관인으로 함께한 한 시헌 선생에게도 신앙인의 삶을 듣고 보는 유익함이 있었을 것이다.
베스도는 바울의 소송 건이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예수님은 죽어 장사되어 유대인의 문제가 된 그 어떤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바울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가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구원자이자
지금도 살아계신 생명의 주님이시다.
이것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베스도와 바울의 차이이다.
이는 불신자와 신자의 근본적인 차이 이기도 하다.
어떤 문제나 사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는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주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주님의 부활이 나에게 삶을 규정하고 생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정해주고 있는가?
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 생명의 주 되심을 감사하며
평생을 이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살게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다.
아그립바 왕과 여러 귀빈들 앞에서 베스도가 전하는 바울에 대한 소견은 한마디로 무죄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황제에게 상소한 그 사건에 붙일 마땅한 죄명조차 없다는 것이다.
죄없는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으려니 모든 것이 난감한 상황이다.
그래서 베스도는 죄목을 찾으려고 아그립바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바울과 같아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허물을 찾으려 해도 허물이 없는 선하고 정직한 삶이 우리 것이어야 한다,
다니엘을 시기한 사람들이 다니엘을 가리켜 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단 6"5) 한 말이야말로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이다.
사람이 죄가 없고 정직하면 만사에 떳떳하고 당당하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부끄럽거나 숨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그런 나의 삶을 인정해준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럽겠는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비친 나의 모습이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선하고 정직한 모습, 다니엘처럼,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