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1. 5. 10. 11:35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성년의 날 등

많은 지정 일이 있는 달이다.

 

부모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은 무엇일까?

기쁨과 행복일 수 있고 많은 책임감과 무게감이 주어지는 이름일 수 있겠다 싶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식이 있어야 한다.

요즘 젊은 부부는 되어도 부모가 되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식을 낳고 기르고 교육시키며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역활이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삶이 힘들어서 부모되기를 포기하는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치관의 변화는 가정과 부모에 대한 가치 마저 허물어져 가고 있다.

 

과거에는 결혼하면 자식을 낳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빨리 자식을 낳지 못하면 걱정하고 염려하며 기도하고 노력했다.

심지어는 조선 시대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의 하나로 집에서 쫒겨나기도 했었다.

불임이 여성 탓만이 아닌데 무지한 결과로 여성들이 참 많이 고생했다.

 

부모가 되어 봐야 진짜 어른이 되고, 더 큰 사랑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는 것인데

자기애에 갖혀 부모 되기를 포기하는 시대가 되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고 경제력이 생기면서 골드미스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싱글맘의 당당함도 있지만 익숙한 환경이 되어 버렸다.

과거에는 애비없는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들으며 편견에 힘들어 했던 시기도 있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대변하는 말이다 싶다.

그러나 요즘 가정의 자녀 교육은 아버지의 몫이 아니라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이것은 농경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동시에 유발된 사회현상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아버지에게서 삶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보고 따라하면서 배웠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는 아버지는 경제활동을 위해 집에서 멀리 나가게 되고

가정의 살림살이와 자녀교육은 어머니들에게 맡겨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역활은 줄어들고 어머니들의 역활은 커져 가게 되었다.

물론 최근에는 아버지들이 육아에 관심을 갖고 함께 수고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지만 말이다.

 

또한 성의 평등화, 남성의 여성화, 모계중심사회, 페미니즘의 강조는 가부장적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아빠들이 어린 아이들을 안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이 익숙하고,

남자들의 요리 문화도 어색하지 않고 가사를 하는 모습도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 

자녀는 누구의 성을 따를 것인가? 호주는 누구인가? 집에 문패는 어떻게 달아야 하는가? 등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간통이 죄가 되지 않는 사회, 정상적인 부부가 부부 외 애인을 두고 혼외 정사를 하는 등

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너무 관대해져 버렸다. 죄가 죄가 아닌 사회가 되어 버렸다.

태어나서 어린이 집, 유치원, 초등학교는 여성이 교육의 중심에 있고, 중.고 등학교도 상당수가 여교사가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언론과 T.V의 각종 프로그램도 남성의 힘, 강인함, 용기, 끈기와 인내, 과묵함 등등의

내용은 줄어들고, 수다와 요리 등의 토크 중심, 부드러움, 아기자기한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배워야 알 지혜와 삶의 모습, 아버지의 역활을 제대로 배우고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강인하고 용감한 아버지 보다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를 좋아하니 말이다.

아버지 한테서 술도 배우고 대화를 통해,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인생을 깨달으며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고 아버지에 대한 정체성을 배웠다.  

물론 아버지는 엄하고 가까이 하기가 조금은 무서운 대상이었다.

과묵한 것이, 듬직함이 미덕이었고, 아버지는 입이 무거운 것이 미덕인 시대도 있었다.

남자는 울지 않는다고 ...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약한 모습이라고..

그래서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삼켰다.  

사랑과 애정을 잘 표현하지도 못했다.

물론 아버지들은 자신의 약함과 힘듦과 고달품을 자식들에게 보이기 싫어하셨고 표현하기를 꺼려했다.  

 

어머니에게서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섬기고 가정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분, 자상한 어머니를 바라보고 배웠다.

잘못을 해도 모든 것을 끌어 안고 용서하시며 타이르시는 어머니 상이었다.

그래서 잘못을 하거나 무엇을 부탁하려면 엄마에게 부탁을 한다.

로마 카톨릭도 그래서 마리아 상을 세우고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방법인가?

이해는 가지만 그러나 그것은 신학적으로는 맞지 않다.

 

이렇게 구별된 역활이 있었고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뚜렷한 가치관이 형성되었으나

이제는 모든 것이 중성적이다. 부드러운 아버지 엄한 엄마.. 이런 모습이 정상일까?

장단점이 있겠지만 전통의 가치가 무조적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과거 가치를 무조건 폄하하는 모습은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모든 창조 세계는 질서가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남녀의 구분이 있고, 남편과 아내의 구분이 있어야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활이 있다.

 

부모라는 이름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엄마가 되면 자식을 향한 놀라운 힘과 사랑과 희생과 능력이 나타난다.

아버지가 됨으로써 인내와 수고와 사랑과 헌신을 하게 만드는 놀라운 변신을 하게 만든다.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학습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아는 부모의 역활이 있다.

동물들도 그러한데,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접한다.

자식을 학대하고 굶기고 죽이는 천인공노할 일들이 갈수록 자주 들리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회가 왜 이렇게 악하게 변해갈까?

 

부모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결혼 예비학교, 아버지 학교, 어머니학교, 부부학교 같은 프로그램도 있고

가정과 부모에 대한 각종 프로그램들도 소개되고 있지만

가정은 점점 붕괴되고 부모같지 않은 부모들이 늘고 있다.

 

부모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아가페적인 사랑과 헌신과 섬김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이나 관련 T.V프르그램을 보면 인간 보다 더 자식을 아끼고.

쉬지 않고 먹이를 잡아다 새끼들을 먹이는 새와 동물들을 볼 때면 작은 감동과 도전이 되기도 한다.  

믈론 건물의 붕괴나 사고 때 어린 자녀를 살리기 위해 자기 가슴에 끌어안은 자세로 죽은 엄마들의 소식도 접한다.

본능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준 부모로서의 본성이다.

 

어제 설교는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창피와 수모와 부끄러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 나아와 딸을 고쳐달라고 부르짖는 가나안 여인(이방인, 수르보니게 여인)에 대한 설교를 하셨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 취급을 당한다 해도 딸을 고칠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하겠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부모이니까, 내 자식이 아프고 힘드니까.

내가 어떤 취급을 당하든지 자식이 나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부모의 마음을 읽는다.

이것이 부모의 참 모습이 아닌가?

자녀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자신 보다 나이 어린 선생님 앞에서 연신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고

더 잘못을 하여 경찰서에 가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모다.

부모들은 왜 그래야 할까? 우문현답이지만 부모니까 그런 행동이 가능하다. 아니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자신은 굶어도, 배고파도 참을 수 있다.

자신은 멋진 옷을 입지 못해도 아무리 몸이 망가질 정도로 힘들고 고생을 하여도 

남들 자식보다 비교되지 않게 하려고 맛있는 것을 사 먹이고, 욕심을 내어 옷을 사고, 과외를 시킨다.

당신들의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한다. 자식을 위하여

자식이 무엇일까? 나의 분신이다. 자식을 사랑함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려니..

하지만 과유불급. 지나친 자식 사랑이 화를 자초하여 자식이 비뚤어지고 잘못되는 경우도 많다.

살아오면서 제일 힘든 것이 자녀 교육이지 아닌가 싶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좋은 성품, 착한 행실, 올바른 가치관, 정직하고 성실한 삶 ...

자신은 '마담 풍'하면서 자식에게는' 바람 풍' 하라고 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가?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성악설을 믿는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가정의 달, 부모라는 단어에 대한 묵상을 해 보았다.

 

나는 좋은 부모인가? 그렇다고 말 할 자신이 없다.

아직도 자신이 없고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한다.

좋은 부모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서 내 자녀가 좋은 부모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인내하면서 기도해 줄 뿐이다.

 

내가 가진 지혜와 지식과 경험들을 잘 전해주고 권면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