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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경제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8. 18. 13:53

2025.8.18

 

[ 성경과 경제 ]

 

성경이 경제와 노동을 보는 방식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중국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지식노동'이 '육체노동'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뿌리 깊었다.

상류층 남성은 손톱을 길게 기르는 등 육체노동과 거리를 두는 행위를 신분의 상징으로 삼았다.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육체노동에 대한 차별을 제도화했다.

브라만, 등 상위 카스트는 수공업이나 육체노동을 '천한 일'로 여겨, 하위 카스트가 주도 담당했다.

중동, 남미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손에 흙이 묻는 일'을 시회적으로 낮게 보는 경향이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도.로마 전통에서도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노동을 천시하며 '노예의 일'로 규정했다.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삶을 철학적 삶과 정치적 삶으로 꼽았다.

그들이 철학에 몰두하고 '에클레시아'에 모여 직접민주정치를 실행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노예노동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말한다.

"이익을 위한 상업은 비천하다. 육체적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직업은 천하고 자유민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로마 상류층의 고상한 여가(otium)가 있는 삶을 이상적으로 보았고,

'노동과 거래'( negotium)는 회피해야 할 상태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대단히 독특한 경제관, 노동관을 제시한다.

인간의 경제적 삶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창조의 선함'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

비록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가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시각은 성경 전체에서 굳건한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일을 하시고, 또 쉬시는 분이다.

일과 쉼의 균형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가치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노동자를 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창조기사의 핵심에 나와 있기에,

사람을 혹사해 가며 경제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사회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구약성경은 노동을 창조적 사역으로 격상시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여기서 '경작하다'(히. 아바드)란 단어는 '예배하다'와 동일한 어근이며,

'지키다'(히. 샤마르)라는 단어도 제사장적 돌봄을 의미한다.

인간의 노동은 신적 소명을 실현하는 행위다.

유대 랍비들도 장인.상인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노동 없는 토라 공부는 공허하다"(찰무드)는 원칙을 실천하였다.

사도 바울은 전문적인 율법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데,

천막 만드는 육체노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 역시 노동자 가정 출신이었다.

초대교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 

그리스 폴리스의 에클레시아와는 달리 육체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에 맞추어져 있었으며, 노예들까지 포함했다.

히브리 성경에서 발원하여 초기 기독교에서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는 기독교의 경제관은

한편으로는 경제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이상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하는 윤리적 비전이 되었다.

 

교부들의 경제적 비전

 

경제생활을 신앙 실천의 중심에 두는 구약과 신약성경의 전통 아래 서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인들은 경제의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예수께서 친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 19:21, 막 10:21, 눅 18:22)는 말씀을 망각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그의 저작 [부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서 부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았으며,

부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부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 얽매인 상태'를 경고했다.

클레멘스는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이웃 사랑, 자선, 공동체를 위한 섬김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구원에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키프리아누스(3세기)는 [선한 인내에 대하여] 에서 노동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겸손과 인내를 훈련한다고 말한다.

" 하루의 수고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순종과 인내를 배우게 된다." 

요한 크리스토무스(4세기)는 [창세기 강해]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노동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이 아니라, 인간을 훈련하고 겸손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6세기)의 "기도하고 일하라"는

수도원의 기본 정신은 노동과 경건이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중세 초기의 수도원은 이런 정신 아래 농없과 수공업을 영적 실천으로 통합했고

포도주 양조, 제분 기술, 삼포제 등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중세시대의 암과 명

 

성경에 기초한 노동관은 중세 후기로 가면서 교회의 제도 자체가 기득권의 구조가 됨으로써 성경적 분류에서 이탈해 갔다.

이런 현상을 합리화한 사상적 틀은 성직과 세속의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원론이다. 

기독교가 그리스 로마 철학의 이원론을 신학의 틀로 삼으면서

물질세계에 대한 긍정이라는 창조신학의 궤도를 이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유럽의 수도원이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며 신뢰 기반 금융을 실천했던 기여는 인정해야 한다.

루카 파치올리(1445-1517)는 중세 말기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회 수사이자 수학자로,

1494년 출간된 [산술, 기하, 비율 및 비례 총람]을 통해, 현대의 복식부기 원리를 개발했다.

파치올리는 당시 베니스 상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거래를 차변(차입)과 대변(대출)으로 분개하는 방법을 체개화했다..

각 거래는 두 계정에 동시에 기록되고, 이후 원장에 집계되어 결산이 이루어지는 절차를 정립함으로써

회계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500년 이상 유지된 복식부기 원리는 오늘날 IFRS(국제회계기준)의 토대가 되었다.

 

파치올리는 수도사였으며, 회계장부 작성에 기독교적 신앙고백을 담으려 했다.

훌륭한 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장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작성해야 하며,

장부가 바귈 때마다 시작 부분에 십자가를 표시할 것을 권장했다.

그의 회계학은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 양심, 윤리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파치올리의 비율 설명이 그의 역작 [마지막 만찬]의 원근법 탄생에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괴테복식부기가 "인간의 지혜가 낳은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라고 격찬햇다.

자산, 부채, 자본의 변동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한 이 원리는 거액의 투자를 가능하게 했다.

당장 그 효용이 나타나지 않는 장기적인 투자는 전체 비용에 대한 면밀한 산정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파치올리의 회개학은 서구국가들의 경제적 번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 직업소명론의 의의와 한계 

 

종교개혁은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교회 제도 유지를 위한 신탁이 아니라, 성경을 정직하게 읽는 데서 나오는 신학이었기에 

노동관과 경제관에 있어서도 성경의 원리를 회복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마틴 루터는 "일과 직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다라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의 장"이라고 했다.

이로써 중세 카톨릭이 성직을 우위에 두었던 가치관을 깨고, 

모든 노동의 가치를 평등하게 보는 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상업에서 공정한 거래와 경제적 형평성을 강조했다.

사치와 쾌락을 위한 해외 무역, 독점, 고리대금 등을 비판했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지대수익)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를 환수하여 세금 대신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후에 헨리 조지의 지대론으로 발전되는 관점이다.

 

장 칼뱅은  직업소명이 인간을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중심으로 보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각기 다른 부르심(vocation)을 받았으며,

그 부르심은 특정한 '직업'을 통해 구체화된다.

칼뱅에게 직업소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성되어 가는 핵심적인 요소로,

그의 인간이해와 구원론의 핵심에 닿아 있다.

그가 제시한 직업 윤리는 근면과 책임, 검소함과 공동체 기여라는 가치를 통해

근대 시민사회와 경제 발전의 기초 윤리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막스 베버는 이를 두고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토대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칼뱅의 직업소명론은 그 본래의 신학적 뿌리를 잃어버리고,

현대 사회에서 능력주의적 경쟁과 자아 증명의 이데올로기로 왜곡되었다.

하버드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센델은 [공정하다는 생각]에서

현대 사회가 '능력과 성취'를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풍토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능력주의 사회는 칼뱅의 예정론에서 유래한 구원의 확신이 

"성공은 나의 자격 때문이고, 실패는 나의 부족 때문"이라는 오만한 자기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분석한다.

결국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수치심을 안기며, 사회적 신뢰를 파괴한다.

더 나아가 '일'을 존엄한 소명이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증명의 무대로 전락시키는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칼뱅의 초기 소명은 정신, 즉 각자의 자리에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시민이라는

의미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어 놓는다.

 

산업자본주의의 이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의 발전 관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개신교의 출발과 서구 산업자본주의 경제 발전과의 연관성 자체를 부인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산업화에 끼친 기독교의 긍정적 영향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산업화의 그늘에도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산업화는 경제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 이면에는 계층 격차의 심화, 도시 빈민의 확산, 인간 존엄의 훼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 러스킨과 헨리 조지는 당시 주류 경제학의 논리에 도전하며,

인간 중심의 경제, 정의로운 분배, 공동선을 위한 구조적 개혁을 주장하기 위해서 다시 성경을 들여다보았다. 

존 러스킨[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경제 원리로 삼자는 대담한 제안을 한다.

인간의 노동과 제화를 단순히 시장의 거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이웃을 위한 봉사이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는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경제는 효율상보다 정의를, 축적보다 나눔을 지향해야 하며,

이는 예언자적 전통이 줄곧 외쳐온 공의와 자비의 경제에 근거한다.

러스킨은 특히 '부의 축적'이 아니라 '삶의 질'과 '공동체의 안녕'을 경제의 최종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시편과 잠언의 경제관, '의인은 베풀고, 악인은 착취하며,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성경의 경제윤리가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경제 비번의 토대라고 밝힌다.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경제 발전 속에서도 가난이 깊어지는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며, 

그 원인을 토지 사유화와 지대의 독점에서 찾았다.

그가 제안한 '단일세'는 땅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공동체 전체의 이익으로 환수하자는 주장이었으며,

이는 레위기 25장의 희년 정신,

즉 "땅은 내 것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거류민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조지는 토지의 사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며,

땅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신앙  고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성경이 끊임없이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위한 공평'을 강조하며,

사회경제 구조가 이들을 배제할 경우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경제 비판의 근거로 삼았다.

 

금융자본주의와 ESG의 도전

 

현대의 금융자본주의(financial capitalism) 에서 문재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금융자본주의는 생산보다 금융 거래와 자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중심에 둔다.

기업의 본질은 '가치를 창출하는 것'에서 '주주 이익(shareholder value)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바귀었고,

실물경제보다 금융 이익, 고용보다 주가, 장기보다 단기 수익이 우선되게 되었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는 투기적 자본이 생산보다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 노동과 환경은 비용으로 간주되며, 

그 결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생태계가 파괴된다.

한국의 30대 직장인들이 월급을 저축하며 미래를 계획하기보다

주식투자와 코인에 매달리는 현상은 금융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다.

 

예일의 신학자 캐스린 태너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형성된 기독교의 경제윤리가 

금융자본주의의 파괴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인간을 과거의 부채, 현재의 노동, 미래의 불안에 종속시키는 구조라고 분석한다.

부채는 개인의 과거.현재.미래를 하나의 사슬로 묶어 버리고,

경제적 행위의 목적을 오로지 빚을 갚는 데 집중하게 만든다.

이는 인간의 희망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앗아가고, 현재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로 이어진다.

금융자본주의는 승자독식, 능력주의, 불평등의 심화 등 다양한 사회적 병폐를 낳으며,

특히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긴다.

 

테너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인 '은혜'의 논리를 경제적 영역에  적용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는 조건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경제 시스템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원리를 따라, 인간 사회도 경쟁과 희생, 배제 없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경제 시스템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가 '서로 연대하고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않는' 공동체를 보여 주었듯이,

오늘날의 교회는 금융자본주의 경쟁과 배제를 넘어서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구현할 책임이 잇다는 것이다.

 

금융자본주의의 키플레이들(팀 스포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핵심 선수) 역시 이 체제의 파괴적 속성에 무감하지 않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라는 투자기준이다.

금융계의 큰 손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단기적인 이익실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아래 세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 기업의 제품과 생산 과정이 얼마나 친환경적인가?'(E),'

'사회를 향해 책임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가?'(S), 

'의사결정구조가 투명하고 민주적인가?'(G) 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은 '윤리적 투자에 대한 자본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거대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경쟁의 장에서의 통용방식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그 지향에 있어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ESG라는 기준이 확립되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세계교회협의회9WCC)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성경적 가치 실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왓다.

경제정의와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노력은 학계에 지속적인 도전을 던졌고, UN을 통해서도 영향을 끼쳤다.

오랫동안 경제성장의 기준으로 통용되던 국민총생산(GNP), 국내총생산(GDP), 등을 넘어서는

대안적인 경제평가기준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운동은

ISEW라는 '지속 가능한 경제복지지표'((Index of Sustainable Economic Welfare)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ISEW 는 GDP 와는 달리 자원 고갈, 환경 훼손, 빈부 격차, 주부의 노동 가치, 범죄 비용 등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요소를 고려한다.

이 기준의 확립은 현대 금융자본가들이 ESG 라는 혁신적 사고에 이르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ISEW 는 과정신학자로 잘 알려진 존 캅에 의해 이루어졌다.

성경적 가치를 현실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현대 금융자본주의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ESG가 자산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거대기업 간의 또 다른 전쟁터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ESG는 인간다운 삶의 생태계 보전을 위한 커다란 진전임에는 틀림없다.

ESG의 방향에 동참하면서, 그 경제적 방식이 놓치기 쉬운 약자들에 대한 배려에 교회가 깨어 있어야 한다.

 

성경의 요청 :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

 

간단히 살펴본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경제문제가 우리 신앙의 중심적인 주제임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있었고, 그들이 세계 경제의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는 사실이다.

갈라디아서 2:10의 해석사는 성경의 경제적인 명령이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다.

갈라디아서 2:1-9에는 할례와 무할례를 둘러싼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의 긴장과 갈등이 보도된다.

신학적 토론을 거쳐 두 진영은 화해에 이르면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현대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의 '가난한 자들'을 예루살렘 교회로 보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도우라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교부들은 대체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할례와 무할례, 구원론을 중심으로 심각하게 갈라져 있던 교회가

공통의 기초를 확인한 자리가 경제명령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신학적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우던 두 진영이 합의할 수 있었던 지점은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경건의 핵심으로 간주했다(*약 1:27).

사도 바울이 그의 고별설교의 절정에서 언급하는 예수님의 말씀 역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라는 경제적 명령이었다.

우리는 경제와 관련한 성경의 명령을 주변부로 밀어낸 신학적 경향을 되돌아보며 반성해야 한다.

한편으로 영은 고귀한 것으로, 육은 저열한 것으로 보며 육체노동을 천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물질을 숭배해 온, 기묘한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성경적 신앙의 본류로 돌아가는 길도, 물질주의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도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박영호 목사, 매일 성경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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