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8. 주일
매일성경에서 옮김. - 권연경 교수
말씀을 존중하는 말씀 읽기
1. 대화의 기본자세 - 겸허한 듣기
목소리 없는 글로 만나지만, 성경을 일고 해석하는 일은 누군가와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는 일과 유사하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 상대자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한다. 그래서 말씀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늘 조심스레 성경을 읽으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실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태도는 느슨할 때가 적지 않다.
성경읽기가 '고민거리'가 되는 이유 중 하나다.
본문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례 중 하나는 읽다가 마는 것이다.
설교 시 성경봉독을 할 때처럼 기계적으로 읽기는 한다.
하지만 생각은 본문 어디선가 멈추고, 나머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부분에만 집중하며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음식 전체를 먹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맛을 그중 일부만 골라 먹어서는 느낄 수 없는 법이다.
선택적 읽기는 본문의 의도와 다른 자의적 해석을 낳는다.
읽기의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일부만 골라 읽어 생긴 일이다.
말씀을 읽는 우리의 실제 태도를 돌아보는 의미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2. 말씀 건너뛰기 - 세 가지 사례
1) 포도원의 노래(사 5: 1-7)
선지자는 '내가 사랑하는 분' 곧 하나님을 농부에 견주면서, 그가 가꾸는 포도밭에 관해 노래한다.
그의 포도밭은 기름진 산 기슭에 있다(1절).
그는 애써 땅을 고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원을 잘 지키려고 망대도 세우고, 포도즙 틀까지 파두었다.
이렇게 지극정성을 다하고선 이 포도밭이 멋진 '포도'(개역개정, '좋은 포도')를 맺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맺힌 것은 못 먹는 '들포도'다(2절).
그래서 농부가 직접 고소인으로 등장하여,
배심원들인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에게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를 판단해 달라" 요구한다(3절).
사실 농부는 더는 해 줄 것이 없을 만큼 포도밭에 정성을 다했다.
당연히 좋은 포도가 맺히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들포도'가 맺혔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4절). 재판의 결과는 말 안 해도 뻔하다. 농부의 조치도 명확하다.
원하는 포도를 생산하지 못하니, 그 포도밭 자체를 갈아엎어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다.
비유의 거의 절반이 분노한 농부의 응징 행위 묘사에 할애되었다.
이 본문을 다루는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보면, 이 비유를 해설하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다.
앞뒤 맥락도 살피지 않고, 더욱이 성경 자체의 설명조차 무시한 채, 농부와 포도원의 비유에만 공을 들인다.
그러면서 비유 속 '(좋은) 포도'와 '들포도'를 설교자 자신의 구미와 상상력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한다.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인생의 좋은 포도'라는 제목의 설교도 있었다.
젊은 시절 '고생'하다 나중에는 큰 교회 목사로 '성공'한 사실을 읊으며
이것을 과거의 '들포도'와 지금 '내 인생의 좋은 포도'로 풀이한 설교였다.
듣는 청중 가운데 "아멘!"한 사람도 많겠지만, 이것이 과연 말씀의 의도를 전달한 설교였을까?
2) 건축자 비유(마 7:24-27)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말미에는 그 유명한 '건축자' 비유가 나온다.
누군가 집을 짓는다 치자.
현명한 사람이라면 기초가 든든한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세울 것이다.
그러면 우기에 큰 홍수가 나도 기초가 튼튼하니 집이 무너질 일이 없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냥 모래땅에 집을 세울 것이다.
당장은 수월하고 돈도 절약된다. 하지만 막상 우기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홍수가 나서 건기에 없던 급류가 생기면, 모래땅은 금방 휩쓸리고 만다.
그 위에 있는 집이 무사할 리 없다. 매우 깔끔한 비유다.
나에게 이 비유는 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중요성 이야기로 이해되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님'이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 심판의 홍수에도 끄덕없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의로움'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니 심판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나'라는 모래 대신 주를 향한 믿음의 반석에 집을 세워야 한다.
여러 청중을 만나다 보면, 본문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가 정말 그런 것일까?
3) 세상의 소금(마 5:13)
좀 더 익숙한, 그래서 더 잘 아는 느낌이 드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 소금으로 비유하는 본문이다.
너희는 세상(정확히는 '땅')의 소금이니 ...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이 말씀을 "세상의 소금이 되자"는 격려 내지는 명령으로 이해할 것이다.
물론 소금이 된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이미(!) 잘 안다.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가 되고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도 된다.
주님의 제자는 음식 아닌 '세상'의 소금이다.
곧 세상의 부패를 막고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본문의 의미다.
저명한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다. 마침 이 본문이었다.
말씀은 먼저 우리를 소금으로 만드신 은혜를 강조하고,
그러니 그 은혜에 맞게 소금처럼 살자고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소금답게' 산다는 것은 모두에게 익숙한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여태 들어온 숱한 설교들도 다 그랬다. 당연한 이야기라 여길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익숙한 의미가 정말 예수님이 의도한 그런 의미였을까?
3. 겸손하고 차분하게 다시 읽기
당혹스럽게도 앞서 소개한 세 구절은 모두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대충'일 수 있는지 실증하는 사례들이다.
공부를 못해서도, 해석에 필요한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도 아니다.
읽으면 바로 알 수 있는데, 그냥 우리가 건너뛰고 읽지 않기 때문에 본문의 의도를 놓친다.
허탈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올바른 성경읽기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그야말로 앞에 있는 말씀을 '읽는' 것, 곧 '빼먹지 않고 읽는' 것이다.
중요한 사람의 말을 대충 듣거나 내 맘대로 골라 듣지 않듯이,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건너뜨기나 마음대로 골라 듣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성경읽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 성경 속 말씀은 대부분 우리말 번역으로 차분히 읽기만 해도 얼마든지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다.
1) 포도원의 노래(다시) 읽기
'포도원 농부의 노래'는 통렬한 풍자다. 하지만 비유인 만큼 해석이 필요하다.
이 비유의 구체적인 의미를 알려면,
농부와 포도밭이 누구인지, 또 '포도'와 '들포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물론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유적 풍자가 끝나자마자 7절에서 곧바로 그 구체적 의미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노래한 농부는 처음부터 '내가 사랑하는 분', 곧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포도밭과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집안의 사람들' 및 '유다 사람들'이다.
열매의 정체도 분명하다. 농부인 하나님이 기대하신 '포도'는 '정의'와 '공의'다.
반면 포도밭, 곧 이스라엘과 유다가 맺은 '들포도'는 '잔인한 피 흘림'과 '울부짖음'이다(7절).
우리말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이 구절에는 '미쉬파트'(정의)-'미쉬파하'(잔인한 피 흘림),
'체다카'(공의)-체아카'(부르짖음)와 같은 언어유희가 사용되어
'포도'와 '들포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보여 준다.
즉 농부의 포도밭 비유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이를 배반하는 백성의 사악함을 극적으로 대조한다.
배신의 핵심은 하나님이 기대하는 '정의와 공의'라는 '(좋은)포도'를 산출하기는커녕
백성 공동체를 '잔인한 피 흘림'과 '부르짖음'이라는 '들포도'로 채우는 사악함이다.
본문이 긴 지면을 할애하여 적나라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처럼(5-6절),
이들에게는 처절한 심판이 내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 풍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누린 언약 백성이면서도
그분이 기대하는 정의와 공의 대신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향한 준엄한 심판 선고다.
이런 본문의 뜻은 금방 알 수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마지막 7절에서 예언자 자신이 상세한 해설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해석을 곧잘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배시간에 '봉독'한 모든 설교 본문에는 7절도 들어 있다.
하지만 '받들어 읽을 '뿐, 생각하며 따라가지는 않는다.
왜 가장 중요한 결론을 무시하는지 따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요구, 잔학한 욕망에 대한 질타가 싫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문을 모른 척하는 읽기는 제대로 된 읽기로 통용될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너무 쉽게 이런 자의적 선택을 자행한다는 사실이다.
2)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차이
골라가며 '대충' 읽는 습관은 누구나 '잘 아는' 본문에서도 나타난다.
역설적으로 모두 잘 아는, 혹은 잘 안다고 생각하는 본문이
오히려 이런 선택적 읽기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명한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에 관한 비유적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산상수훈(마 5-7장)의 마지막 결론에서
예수님은 천국 진입 여부를 결정하는 심판의 기준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실천 여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신다.
목청 높혀 주께 "주여, 주여!"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입술로 아무리 멋지게 고백한들,
천국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그런 나라다(7:21).
심지어 예언자로 섬기고, 귀신을 쫓아내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일도
그분 뜻을 배반하는 '불법'일 수 있다(7;22-23).
중요한 것은 화려한 성과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소개한 통상적인 이해와 달리,
집을 짓는 두 사람 이야기는 바로 이 실천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비유적 논증이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의도는 불을 보듯 뻔히 드러난다.
아예 그 논점을 선명하게 제시하며 비유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24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26절)
여기서 '현명한 사람'은 주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똑같이 주의 말씀을 듣고도 이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 비유의 뜻은 더없이 선명하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애초부터 듣고 실천하는 사람과 듣기만 하는 사람을 대조하기 위한 비유적 가르침이다.
처음부터 이 논점을 천명하며 비유를 소개한 마당에 이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이 부분을 건너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의 핵심 의도를 피해 간다.
성경을 많이 읽은 이들 중에서도 " 이 말씀이 그런 뜻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다" 하는 분이 적지 않다.
이들이 유독 나쁜 독자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다 그렇다.
말씀이 더 없이 소중하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말씀을 제멋대로 대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3) 제자를 소금에 비유하시는 의도
워낙 '잘 아는'(?) 말씀인 것 같지만, 소금에 관한 말씀도 예수님의 핵심 의도를 놓치는 사례 중 하나다.
여기서도 잘못은 본문의 일부만 집착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태도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하는 대목만 생각할 뿐, 그 뒤 길게(!) 이어지는 말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소금이 맛을 잃는 상황 이야기도, 맛을 잃은 소금이 처절하게 버림받는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바로 그 부분에 예수님의 핵심 의도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들은 소금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소금이 "되자"(청유형)도 아닌, "소금이다" 하는 직설법이다.
사람을 향해 "소금이다" 했으니 일종의 비유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소금으로 불러 주신 은혜'를 감사할 게 아니라,
우선 제자를 소금에 견주는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물론 '소금'이라는 말만으로는 그 의도를 알기 어렵다.
소금의 어떤 면을 두고 그렇게 비유하신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제자가 소금에 비유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물론 제대로 읽기만 하면 주님의 의도는 매우 명확하다.
직접 친절하게 그 비유의 의도를 설명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소금이라는 말만 듣고 마치 주님의 의도를 파악한 것처럼 착각하고,
"방부제가 되자", "조미료가 되자"고 목청을 높힌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생각해 낸 의미이지 실제 주님이 제시하신 설명이 아니다.
개역(개정)의 모호한 번역이 오해의 원인을 제공했다.
여기서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는 (방부제든 조미료든)
소금의 역할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니라 소금이라는 물질의 속성을 지적하는 언급이다.
개역개정은 능동태로 "짜게 하리요" 하고 옮겼지만, 정확히는 수동태로 "짜게 되리요"다.
음식을 짜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금 자체가 다시 짜게 된다는 뜻이다.
최근의 다른 번역들은 정확하게 잘 번역해 놓았다.
"무엇으로 짠맛을 되찾겠어요?"(새한글성경).
성경 번역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논의하도록 하겠다.
소금은 그 속성상 한 번 맛을 잃으면 그 맛을 되찾을 수 없다( How can it be salty again?).
이렇게 되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된다.
쓸모없는 소금의 유일한 운명은 "밖에 버러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뿐이다.
편리한 대로 맛을 잃었다 다시 찾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맛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어서, 그 뒤엔 그야말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림(심판)을 받을 뿐이다.
이처럼 13절 전체를 다 읽고 생각하면,
이 말씀은 "소금이 되자"는 격려나 명령이 아니라, 제자다운 맛을 잃는 상황에 대한 경고다.
이 경고에 힘을 더하기 위해 아예 제자를 '한 번 맛을 잃으면 회복되지 않는 소금'에 비유하신다.
일단 제자로서의 맛을 잃으면 버려질 수밖에 없으니 애초에 그맛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이다.
박해를 견디며, 제자다운 맛을 지키는 이들에게 주는 축복에 이어(5:10-12),
반대로 박해를 피하려고 제자다움을 포기하는 상황에 관해 경고하신 것이다.
4. 말씀 존중을 실천하는 말씀 읽기
위에 든 몇 가지 사례는 성경을 '대충', 혹은 '내마음대로' 읽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일은 늘 어렵다.
내 말은 한 시간을 떠들어도 남의 말에는 금방 지친다.
우리가 본래 자기중심적이라 그렇다.
이런 성향은 성경 말씀 앞이라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쉽게 주의가 산만해진다.
특히 재미없거나 불편한 말씀을 읽을 때는 더 그렇다.
슬쩍 흘려듣기도 하고, 대충 넘겨짚기도 한다.
그리고 그 틈새로 내 생각과 욕망이 스며들어 말씀과 뒤엉킨다.
그래서 머리에 남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내 생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때론 아예 말씀을 비우고 그 속에 내 생각을 채우기도 한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좀 어렵게 말하자면 '해석학적 우상숭배'다.
제대로 된 성경읽기는 나의 이런 모습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데서 시작한다.
말로만 "하나님 말씀, 하나님 말씀"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을
실제 성경읽기에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말씀이라는 나라에 들어간다.
말씀 앞에 내 눈길을 낮추는 겸손, 더 조심스럽게, 더 세심하게 말씀을 읽으려는 열심,
이것이 바로 올바른 성경읽기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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