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과 문맥을 고려한 읽기
상황 속의 언어
한 작은 극단이 대하드라마를 무대에 올린다.
당연히 드라마 속에는 숱한 인물이 나오고 또 사라지지만, 막상 소속 배우 수는 많지 않다.
그래서 '일인다역'이 불가피하다.
처음 마을 이장이었던 배우가 나중에 그 사람의 증손자로 다시 등장한다.
살짝 흥미로울 뿐, 같은 배우라고 해서 두 인물을 혼동하지도 않는다.
드라마 속 역할이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이 꼭 그렇다., 우리는 대하드라마처럼 '할 말 많은' 인생을 살고, 그런 만큼 온갖 말을 떠든다.
하지만 막상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별로 많지 ㅇ낳다.
방대한 어휘를 자유자재로 휘두를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말을 못 해 답답한 것도 아니다.
많지 않은 수의 어휘지만, 이를 요리조리 굴리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산다.
한 배우가 일인다역을 하듯, 같은 말이라도 상호아이 달라지면 뜻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말은 언제나 상황적이다.
하 냅우가 상황에 따라 이장이 되고, 이장 증손자가 되는 것처럼,
같은 단어나 표현이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된다.
'(배가) 부르다'와 '(이름을) 부르다'처럼 의미의 연관이 없는 '동음이의어'가 되기도 하고,
모종의 공통분모를 지닌 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상황이 뚜렷한 이상 혼동의 위험은 없다.
여러 의미를 품고 있어도 상황이 특정되는 순간 그에 맞는 의미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단어나 표현 자체는 여러 의미의 기능성을 품고 있지만,
그 표현이 특정 상황과 만나는 순간 그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의미가 선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가 쏠개'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이 말이 활이나 총 같은 것을 '쏘다'라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식당이나 술집에서 '지갑을 연다'라는 의미로도 스이기 시작했다.
같은 말이지만, 둘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사격장에서는 '사격한다'는 뜻이고, 식당에서는 '내가 계산한다'는 뜻이다.
상황이 특정되지 않는다면, 이 표현은 모호한 채로 남는다.
또 '키보드가 고장 났다'는 말을 보자.
'키보드'라는 하나의 단어이지만, 상황에 따라 가리키는 대상이 달라진다.
학교 컴퓨터실에서라면 컴퓨터 자판을 가리킬 테고,
교회 찬양팀 연습 시간이라면 건반악기를 가리킬 것이다.
'씹는다'는 말도 그렇다.
과거에는 칡이나 껌처럼 무언가를 치아로 씹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사람을 '씹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흉본다는 뜻이다.
휴대전화 시대에는 문자를 씹는다는 의미도 생겨났다.
'야 그만 좀 씹어!' 하는 말이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친숙한 단어나 표현일수록 말은 역할(의미)도 많다.
그런데도 전혀 혼동되지 않는 것은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구체적 의미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쉬운 단어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사전에서 get, take, give, have, put 등과 같이 '쉬운' 동사를 찾아보고
그야말로 끊없이 이어지는 다른 의밍세 좌절한다.
단어 하나가 혼자서, 혹은 다른 말과 붙어 온갖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한 단어가 익숙한 것과 그 단어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의미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fire!' 라는 하나의 표현이 상호아에 따라 '불이야!'도 되고, '사격!'도 된다.
직장이라면 '해고'가 될 것이다.
똑같은 'rapture'라도 어떤 때는 '(기분이 좋은) 환희'이고, 어떤 때는 '(위로 끌려 올라가는)휴거'다.
그러니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한 표현이 상황에 따라 어떤 의미가 되는지 잘 안다는 말이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을 길게 늘어놓은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많은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바로 표현의 의미를 선명하게 해 주는 '상황' 혹은 '문맥'을 무시하는 잘못이다.
성경의 언어도 오늘 우리의 언어처럼 철저히 상황에 기대어 있다..
구체적 상황이나 문맥을 무시하면 그 말의 구체적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지금 본문이 어떤 상황이나 흐름에서 나왔는지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호한 채로 남겨 두지도 않는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인 의미를 찾으려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내 앞의 말씀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문맥을 생각해 낸다.
이것은 본문 자체의 상황/문맥일 수도 있고 본문과 상관없이 나 스스로 선택한 상황/문맥일 수도 있다.
본문의 상황을 잘 파악한 것이라면 본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고,
본문과 전혀 다른 상황을 상상했다면 그야말로 '내가복음'을 쓴 결과가 될 것이다.
사례 하나, 기도 응답과 임재의 약속?
상황을 놓치면 의미를 놓친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예를 생각해 보자.
마태복음 18장에는 교회, 혹은 공동체와 관련된 몇 가지 가르침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은 아마 19-20절일 것이다.
우선 19절은 기도 응답에 관하 ㄴ약속으로 자주 소개된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절).
이와 비슷하게 그다음 구절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임재의 약속으로 이해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
마음의 위로가 되는 멋진 약속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본문의 정확한 의미일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의 억지스러움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19절은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한다.
멋진 약속이지만, 질문이 생긴다.
'나 혼자 기도하면 안 들어주시나?' 그런데 앞에서는 분명 골방에서 혼자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르는 데서도 다 살펴보시는 하나님이 듣고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6:6).
그렇다면 19절의 약속은 무엇일까?
혼자 해도 어차피 들어주실 건데, 굳이 '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가?
20절의 약속도 마찬가지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하시겠다는 말은 '나 홀로 외로울 때는' 함께하지 않겠다는 말씀인가?
물론 그런 말은 아닐 것이다.
6장의 가르침은 기도는 금식이든지 혼자 은밀하게 하는 사람과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닌가?(5:5-6, 17-18).
혼자든 여럿이든, 어차피 함께 계실 거라면, 굳이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이라고 덧붙일 이유가 있을가?
얼핏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앞뒤가 안 맞는 해석이 아닌가?
사실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석이 나온 것은 이 말슴의 구체적인 상황/문맥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말슴의 실제 사오항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대신,
상황을 지우고 그냥 전방위적 적용이 가능한 '보편적 ' 의미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 혹은 '두세 사람'이라는 상황적 변수가
기도 응답이나 임재의 조건으로 해석되는 형국이 된 것이다.
말씀의 상황과 핵심 주장 파악하기(15-18절)
사실 전체 문맥을 고려하여 읽으면,
19-20절이 기도 응답이나 함께하심에 관한 일반적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곧 '형제가 죄를 저지른' 상황이다.
이후 이어지는 말씀은 교회 내에서 이런 상황을 처리하는 정당한 절차에 관한 이야기다.
누군가 잘못한 사실을 알게 되면, 우선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한 영혼의 회복이지 '국민의 알 권리'가 아니다.
그런데 일이 이처럼 아름답게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범죄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많다.
이럴 경우는 드물다. 범죄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많다.
이럴 경우에는 나 말고 '한두 사람'이 더 필요하다.
율법에 따라 사안으 ㄹ확정하기 위해서는 '두세 증인'의 공식적인 증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16절: 신 19:15).
이렇게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말하여'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다룰 수밖에 없다.
만약 교회 전체의 결정에도 승복하지 않는다면 달리 방법이 없다.
그냥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유대인의 숙어로 더 이상 사귀지 말고 "연을 끊으라"은 말이다.
그러니까 교히 공동체에서 쫓아내라는 뜻이다(17절).
결정적인 것은 18절의 선언이다.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제자들의 공동체다.
하지만 그냥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의 결정은 사실상 하늘의 결정과 다를 바 없다.
'따에서'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정죄하거나("매면') 용서하면)'풀면'),
이는 바로 하늘에서 그 사안에 대해 정죄하거나 용서했다는 말과 같다.
교회는 이런 곳이다.
그냥 사람의 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신적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18절의 이 진술은 특히 범죄 사옿아을 염두에 두고 교회의 무거운 권위를 확인하는 말씀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강조의 수사와 (예외 없이) "무엇이든지"라는 첨언은
교회의 권위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다시'라는 수식어가 보여 주는 것처럼,
19-20절은 교회의 신적 권위에 관한 18절의 결정적 선언을 다시 설명한다.
그래서 18절에 나온 '땅에서/하늘에서'의 대조가 19절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너희 중 두 사람'은 그냥 두 사람이 아니라
16절 상황에서 특정된 '두(세) 사람' 곧 범죄의 증인으로 선택된 이들이다.
이들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의 요청대로 이루어 주신다.
흔히 이해하듯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범죄 처리 상황에서 '정죄든 용서든 어떤 쪽으로라도 결정하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뜻이다.
20절도 같은 취지이다.
'두세 사람'은 범죄 처리를 위해 모인 '두세 증인'이다.
이 증인들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일반적인 모임이 아니라
15-16절에 명시된 상황, 곧 형제의 범죄를 처리하기 위해 두세 증인이 함게 모인 곳이다.
이처럼 교회가 율법에 따라 정당하게 범죄를 처리하는 상황에는
땅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하늘의 주님 또한 함께 계신다.
교회의 결정이 사람의 결정을 넘어 주님의 결정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구체적 상황 속에서 19-20절은 기도의 응답이나 함께하심의 조건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권위에 관한 말씀으로 읽힌다.,
특히 구성원의 범죄를 다루는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당한 교회의 결정은 하나님의 결정과 같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례 둘, '옥중'서신 빌립보서 읽기
바울서신 중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세 편지는 '옥중서신'으로 분류된다.
말 그대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중 옥에 갇혔을 때 작성된 편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편지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수의 신분으로 옥에 갇힌 사오항에서 쓴 이야기다.
이 사실은 이 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상황적 단서다.
평범한 상황에서 일반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투옥이라는 구체적 사오항에서,
그야말로 '옥에 갇힌 사람이 할 법한' 이야기를 둘려준다.
이 세 편지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빌립보서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작성 과정에서부터 관련이 깊고,
애초부터 공동체를 염두에 둔 '회람서신'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특정 교회의 소소한 사정을 다루지 않는다.
반면 빌립보서는 마케도니아의 중요 선교지인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다.
그래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 사이의 사적인 사연이 얽힌다.
더 구체적으로이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 동기는 빌립보 교회가 투옥 중인 바울에게 제공한 경제적 도움이다(4:10-20).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바울의 선교에 많은 경제적 도움을 베풀어 왔다(4:15-16, 고후 11:9).
그러다가 이번에도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오랜만에 후원금을 보내왔다(4:10, 14, 18).
이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 기록한 편지가 빌립보서다.
어떻게 보면, 빌립보서에는 '투옥 중'이라는 개인의 형편 및 '경제적 지원과 그에 대한 감사'라는 두 개의 상황이 겹친다.
그러니까 빌립보서는 많은 부분 바로 이런 이중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그 구체적인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후원과 그에 대한 감사
경제적 후원을 받고 쓴 편지라면 그에 대한 감사가 가장 요긴한 사연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이나 무엇보다 먼저 그에 대한 감사가 나올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실제 빌립보서의 시작이 그렇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늘 빌립보 신자들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말한다(1:3-4).
그 이유는 분명하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1:5).
이 문장 속에는 경제적 도움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없다.
그러니 상황을 모른 채 이 말만 읽으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막 경제적인 후원을 받은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고 읽으면, 이 두루뭉술한 표현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곧 경제적으로 바울의 복음 활동을 후원함으로써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다는 의미다.
상황 자체가 워낙 분명해서 대충 이야기해도 금방 무슨 뜻인지 알 수 잇는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하는 말도 같은 취지다(1:7).
빌립보 신자들은 경제적 후원을 제공함으로서
바울의 '은혜' 곧 그가 은혜로 받은 사도적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구체적 상황 속에서 '복음에 참여했다'는 말이나,. '은혜에 참여했다'는 말 모두
경제적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이다.
사실 이런 경향은 오늘날의 선교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프리카에 파송된 한 선교사님이 있다.
그는 매년 후원에 감사하며 선교 편지를 보낸다.
편지마다 말은 살짝 달라지지만, 그 취지는 대게 이렇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저의 사역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의 긴 편지에도 '돈' 관련 이야기는 전혀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후원을 주고받는 사이라 그 '동참'이 무슨 말인지 바로 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옥중서신의 또 하나의 용건은 걱정하고 있을 성도에게 안부를 전하며 그들을 안심시키는 일이다.
빌립보서에서도 후원에 대한 감사가 끝난 후(1:3-11), 곧바로 자기 형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1:12-16).
투옥이라는 불행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로 신자들의 염려를 잠재우고(1:12-18),
석방과 처형이라는 두 가능성 사이를 오가며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으로 마음을 정돈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1:19-26).
그러니까 여기 적은 언어들은 전부 이런 상황과 얽힌 이야기다.
우선 그가 말하는 '구원'이 그렇다(1:19).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또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기에
현재 상황이 최종적으로 (처형이 아니라) '나의 구원'으로 귀결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구원' 하면 무조건 신학적 의미의 구원을 떠올리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 단어는 일상에서 온갖 형태의 '구출'을 가리킬 수 있는 일반적인 단어다.
가령 사도행전 27장에서 이 단어는 침몰과 익사로부터의 구원(20: 31,44절),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는 구원(34절), 군인의 칼을 피하는 구원(43절) 등을 두루 가리킨다.
지금처럼 옥에 갇힌 사람이 말하는 구출/구원이라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감옥으로부터의 구출, 즉 '출옥/석방'을 가리킬 것이다.
당연히 바울이 기대하는 빌립보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도
바울의 신학적 구원이 아니라 감옥으로부터의 '석방'일 것이다.
투옥의 정황은 그의 표현 곳곳에 묻어난다.
'지금도 전과 같이'는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감옥에 갇힌 지금도'라는 뜻이다(1:20).
자주 반복되는 '살든지 죽든지' 역시 현재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표현이 아니라
'석방되어 살게 되든지, 풀려나지 못하고 처형되든지' 하는 구체적 의미를 띤다(1:20-22).
이후 신자들의 믿음을 격려하면서 '내가 나를 전제로 들리지라도' 하는 표현도 마찬가지다(2:17).
신자들을 섬기다 투옥되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이것이 신자들의 섬김을 돕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읽어도 의미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투옥되어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이 말을 곱씹으면 이 말의 울림이 사뭇 달라진다.
최초의 테니스 선수, 다윗?
유머의 가장 기본 코드는 말장난이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상황 바꾸기'다.
미국 사람들은 "다윗이 사울의 궁정에서 (악기를) 연주했다"(David played in Saul's court)느 ㄴ사실을 놓고
성경에서 다윗이 최초로 테니스를 친 사람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문맥을 바꾸어 '궁정'을 '테니스 경기장'으로 바구고, 악기 \'연주'(play)를 테니스의 '경기'하는 걸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상호아과 문맥 무시는 성경읽기에서도 가자 ㅇ많은 실수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런 마큼 좀 더 시간을 들여 문맥을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 글에서도 구체적인 사레와 더불어 올바른 문맥 파악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성경 해석법 4.
[ 올바른 상황 파악, 올바른 복음 이해 ]
지난 글에 이어, 상황/문맥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거듭 반복하지만, 우리의 말은 늘 상호아에 기댄다.
따라서 말씀 속 상황을 정확히 모르면 번문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식이든 내가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은
내가 그 말씀에 구체적 맥락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내가 상정한 그 맥락/문맥이 실제 본문에 담긴 맥락이 아닐 때다.
본문의 원래 정황을 다른 것으로 슬쩍(?) 바꾸어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드는 실수다.
이런 실수는 그저 성경읽기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성경이 우리 신앙과 삶의 토대인 만큼,
잘못된 성경읽기는 고스란히 우리의 신앙과 실천에 영향을 미친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이 내 성경읽기를 왜곡하는 것처럼,
잘못된 성경읽기는 내 신앙을 잘못된 쪽으로 치우치게 만든다.
몇몇 사례를 생각해 보자.
고린도전서 3-4장, "공동체 지도자들의 위상"
본문의 의도와 반대로 읽히는 본문 중 하나가 고린도 지도자들에 관한 바울의 충고다.
각자 특정 지도자를 선호하며 갈등하고 분열하는 신자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권고한다.
"이와 같이 우리를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시중꾼이요,
하나님의 비밀들을 맡아보는 관리인으로 여겨햐 합니다"(고전 4:1, 새한글)
오래전 목사 안수 예식에서 설교자가 이 본문을 읽고
"목회자를 귀하게 대우하라"고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목회자는 여느 사람과 달리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존재이니,
그를 귀하게 대우하라는 취지였다.
설교의 최종 적용은 "사례를 넉넉하게 주라"는 훈수였다.
얼핏 읽으면 정말 '귀하게 대해 달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당시 상황을 두고 말하면, 바울 자신이나 아볼로 같은 지도자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충고다.
하지만 정말 이것이 바울의 의도였을까?
오히려 본문의 맥락은 그런 해석과는 반대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잠시 앞으로 돌아가,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상황을 짚어 보자.
편지 시작부터 분명해 지지만, 지금 고린도 교회는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다(1:10-17, 3:9,18-23).
이 분열의 한 양상은 거물들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다.
어떤 신자는 교회를 새운 바울을 선호하고, 어떤 이는 훌륭한 설교자인 아볼로에게 기운다.
각자 자신과 코드가 맞는 지도자들을 빙자하며 서로 분열하고 경쟁한다(1:10- 3:4).
이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도대체 아볼로가 뭐라고, 바울이 뭐라고 그 난리를 치느냐?"는 것이다(3:5).
그럴 가치가 없는 존재를 두고 호들갑을 떤다는 꾸지람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 둘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신자들을 믿게 한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두고 신자들을 믿게 도운 '일꾼'이라 규정한다(3:5, 새한글).
독자적 권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다르 ㄴ이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이다.
바울과 아볼로는 둘 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대로' 일하는 종이다.
바울은 교회를 '심었다', 아볼로는 그 위에 '물을 주었다'(3:6).
하지만 이 둘은 '똑같이' '아무멋도 아닌(nothing)존재일 뿐이다.
정작 생명을 주고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뿐이어서 그렇다.
이 둘은 그저 각자가 맡은 역할만 수행하고, 그에 따라 품값을 받을 뿐이다(3:7-8).
이런 사소란 존재를 , 하나님도 아닌 인간을 들먹이며 서로 갈라지는 행태가 어리석다.
이런 행태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을 고스란히 더러낸다(3;1-4).
사실 제대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 '여러분'(새한글) 곧 신자들의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같은 거물조차도 그들의 것이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이듯,
바울과 아볼로 같은 일꾼들보다 못한 존재들 뒤에 줄을 서서 서로 경쟁한다.
그랴말로 터무니없는 일이다.
4:1의 권고는 이런 꾸지람의 연속이다.
모든 신자는 바울과 아볼로를 거물 아닌 '그리스도의 시중꾼'으로,
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서 무게중심은 '그리스도/하나님'이 아니라 '시중꾼/관리인' 이라는 정체성이다.
'시중군'(헬. 휘페레테스)은 문자적으로 '아랫것'인데,
앞서 나온 '일꾼'(헬. 오이코노스)은 복음서에 나오는 '청지기'로,
주인의 지시를 받아 집안을 돌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나오니 거창해 보이지만,
정작 요점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물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만큼 다른 인간의 평가에서 자유로운 것도 사실이다(4:2-5).
이들이 신자들의 정체성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신자들과 지도자들의 관계에 관한 바울의 관점은 매우 '급진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가르침을 오늘 우리 교회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린도전서 11:17-34, "개인적 성찰, 혹은 서로를 향한 배려?"
성찬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도 말씀에 대한 오해가 우리의 신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사례의 하나다.
성찬식을 할 때마다 집례자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기 전 최후의 만찬에 관한 바울의 회상을 읽으며,
성찬이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의식임을 강조한다(11:23-26).
이어 잘못된 성찬의 위험을 경고하고(11:27), "자기를 살피라"는 권고에 따라(11:28)
잠시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여기서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지은 죄를 제대로 회개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자기를 살피라'는 것은 혹시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지 않은지 성찰하라는 말이다.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다면 성찬을 참여하지 말라는 권유도 이어졌다.
실제 교인 중에서는 종종 무거운 표정으로 정중하게 빵과 포도주를 사양하는 이들이 있었다.
성찬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자세가 나뿔 이유는 없다.
하지만 질문이 생긴다. 우선 거리낌이 있으면 먹지 말라는경고가 그랬다.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바로 내 죄를 위한 죽음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살펴' 내 죄가 분명해지면
오히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살과 피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죄인이라고 속죄의 은혜를 거절하는 태도나 속죄의 은총을 누리려면 깨끗해야 한다는 발상이
조건 없는 은혜의 논리와 맞는 말인가?
또 설사 죄가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먹으면 되지 않나?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 성찬 때가지 기다리라는 이야기인가?
이런 전통적 읽기는 고린도 신자 중 일부가
그간 저지른 죄를 제대로 회개하지 않은 체 함부로 주의 만찬을 먹었다는 상황 설정을 전제한다.
바울은 바로 그런 이들을 겨냥하여
"주의 몸과 피를 부적절하게 먹고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거스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고 경고하며(27절, 새한글),
주의 만찬을 먹기 전 먼저 "자기를 살피라"고 권고했다는 것이다(28절).
하지만 막상 이런 그림은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상황과 거리가 멀다.
바울은 주의 만찬으로 모인 신자들의 태도에[ 화가 많이 났다.
문제의 원인은 내적, 도덕적 성찰의 부재가 아니라, 서로 배려하지 않는 분열이었다(18절).
서로 경쟁하다 보니, '먹을 때에 저마다 자기 음식을 먼저 갖다 먹느라' 여념이 없고,
그결과 '어떤 사람은 배고프고 어떤 사람은 취하는' 사태가 벌어진다(21절).
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깔보는 행동이요, 가난한 이들을 창피하게 만드는 일이다(22절).
이런 식이면 아무리 같이 모여 먹어도 '주의 만찬'이 될 수 없다920절).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 바울이 꾸짖는 잘못은 바로 이런 분열적 행태다.
문제는 그들의 모임이 그냥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다름 아닌 주의 몸과 피를 마시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이런 식사에서의 일탈은 그대로 주의 몸과 피를 거스르는 죄(27절)다.
이런 모임은 은총은커녕 도리어 '심판'을 먹고 마시는 자리가 된다(29절, 새하늑ㄹ).
이런 식이라면 모일수록 '이익'은커녕, '손해'만 커질 뿐이다(17절).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서 각자 "자기를 살피라"고 권면한다(28절).
이 호소는 당연히 주의 만찬을 망가뜨린 실제 원인, 곧 신자들의 분열적 행태를 겨냥한 권고다.
나를 성찰하며 지난 죄를 돌아보라는 주문이 아니라,
파당적 태도를 드러내며 주의 만찬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권고다.
'주의 만찬'으로 모여서는 다른 사람을 무시한 채 '자기 만찬' 먹는 데만 몰두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하나 된 은총의 계기여야 할 주의 만찬을 심판의 자리로 만드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는 권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분열적 행태를 버리고,
먹을 때 "서로 기다리라"는 부탁, 그래서 한 몸 된 공동체로 함게 먹으라는 부탁이다(33절).
바울은 주의 만찬을 먹을 때 "지난 죄를 돌아보라"고 권한 적도,
"그러다 거리낌이 있으면 먹지 말라"고 말한 적도 없다.
이는 우리가 상황을 잘못 파악하여 생겨난 오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오해가 조건 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복음과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성찬에 앞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더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몸과 피를 사모해야 할 이유이지,
마치 다른 해결책이라도 존재하는 양 조건 없는 은총을 거절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이런 치명적 오해의 배후에는 성경 본문의 상황을 놓친 실수가 자리한다.
그저 성경 한 구절에 대한 오해가 아니다.
성찬에 관한 잘못된 생각은 은총의 복음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고,
기쁜 은총의 자리를 무거운 죄의식의 자리로 만든다.
성찬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는 결코 사소한 실수가 아니다.
갈라디아서 5:2-6, "할례가 문제의 본질이다?"
정확한 의사전달에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는 바울의 할례 논증이다.
"보십시오!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
여러분은 그리스도하고는 상관없어졌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여러분은요.
여러분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갈 5:2, 4. 새한글)
바울의 경고는 더없이 선명하다.
할례의 효과는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신자들은 할례를 받는 순간 그리스도와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조치는 신자들의 할례를 막는 것이다.
곧 무할례가 답이다.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정작 할례, 혹은 무할례에 관한 바울의 진술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받는 것이나 할례받지 않는 것이나 별 의미가 없습니다.
도리어 의미 있는 것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믿음입니다"(갈 5:6. 새버역).
"할례받았느냐 할례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 창조입니다"(갈 6:15. 새번역).
할례가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끊어지게 한다.
이런 상호아이라면 "할례는 독!" 이라고, 그래서 "무할례가 해독제!"라 외쳐야 맞다.
그런데 정작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 의미가 없단다.
할례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혼란스럽다. 같은 말이 다른 곳에도 나오는 걸 보면, 부주의한 말실수가 아니다.
바울은 과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여기서 바울의 생각을 파악하는 단서는 그가 요구하는 최종 해답에 주목하는 것이다.
할례/무할례는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믿음'(5:6), 혹은 '새 창조'(6:15)다.
고린도전서의 말로 하자면, 할례를 받든 말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전 7:19).
바로 이런 자태가 신자들이 지켜야 할 복음의 진리다(5:7).
그러니까 바울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신자들이 할례를 받으려 해서가 아니라 복음 진리를 팽개치고 있어서다.
위기의 본질은 할례가 아니다. 그자체로는 할례나 무할례가 다 무의미하다.
약발도 없지만, 독이 든 것도 아니다.
할레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
곧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믿음', '새 장조' 및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할례받으면 끋장'이라는 섬뜩한 경고는 어떻게 된 것일까?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상관이 없다면 왜 "할례받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거품을 물가?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말이 많은 부분 상황에 기대고 있음을 상기한다.
익히 아는 것처럼, 상황이 분명할수록 우리의 말은 느슨해진다.
어차피 뻔한 상황이라, 말을 정확하게 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상황이 이미 할 말을 다 해 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황을 지우면 알아듣기 어렵다.
대충 하는 말을 선명하게 만들어 줄 상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중학생 시절,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공을 찼다.
겨우 10분이지만 짜릿했다. 물론 다시 종이 치는 즉시 다시 3층 교실로 뛴다.
그래야 선생님보다 먼저 교실에 들어가 ㄹ수 있다. 대체로 문제가 없지만, 간혹 일이 꼬였다.
수업 종은 울렸는데, 골대 앞에서 결정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럴 때는 할 수 없다. 상호아이 끝나자마자 뛰지만, 선생님보다 늦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음흉한(?) 미소를지으며 말씀한다.
"공 찬 놈들 다 나와." 그러면 선생님보다 늦게 들어온 대여섯 명이 나가 한 대씩 맞고 들어온다.
뻔한 장면이다. 그런 만큼 선생님의 말도 대충이다.
사실 "공 찬 놈들 다' 나오라 했으니, 공 차다 들어온 열댓 명이 다 나가야 맞다.
그런데 먼저 들어온 친구들은 고소한 표정을 지은 채 꼼짝도 않는다.
말의 액면가와 달리, 공을 찬 것이 아니라 공 차다 '수업에 늦은 것'이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상황이 뻔하니, 선생님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여기서 선생님이 굳이 "공 찬 노들 다 나와" 하고 말씀하신 것은 공을 차다 수업에 늦었기 때문이다.
공을 찬 것 자체가 나뿐 일이 아니다. 선생님도 축구를 좋아한다.
하지만 축구 때문에 더 중요한 수업에 늦는 것은 문제다.
그럴 때는 마치 축구가 언제나 문제인 양 말한다.
얼핏 축구 자체가 나뿐 일인 듯 들리지만,
실은 그 자체로는 나쁠 것 없는 축구가
수업 지각이라는 나쁜 행위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화법이다.
할례에 관한 바울의 진술도비슷하다.
말하자면 바울 선생님이 "할례받은 놈 다 나와" 하고 외친다.
마치 할례 자체가 나쁜 행위 같다.
하지만 할례나 무할례는 사태의 핵심이 아니다.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할례받느라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팽개친다는 사실이다.
사소한 할례 문제로 뒤엉켜 싸우다 진짜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놓치는 어리석음이다.
지금 신자들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믿음, 새 창조 및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팽개치려 한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사태 배후에 할례를 둘러싼 갈등과 혼란이 잇다.
상황이 이런지라 바울은 "할례받으면 끝장"이라고 날을 세운다.
할례 자테에 무슨 교리적 독이 있어서가 아니라,
할례가 복음 진리를 팽개치게 하는 상황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정확하게 풀어 쓰자면 "할례 문제로 싸우다 복음 진리를 팽개치는 놈들 다 나와" 하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고민은 할례가 야기하는 어떤 교리적 위험이 아니다.
복음 진리를 훼손하는 원인이라 문제 삼을 뿐,
할례 자체가 무슨 교리적, 실천적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복음의 진리다.
곧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는 믿음으로(5:6, 13-14, 6:2),
이전 욕망에 이별을 고하고 새로 창조된 존재로 살며(2:19-20, 5:24, 6:15) ,
하나니의 계명을 지키는(5:13-14, 고전 7:19) 그런 삶이다.
할례만 아니라 다른 어떤 가치나 조건이라도 이런 진리의 삶을 훼손하는 것은 다 문제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가 복음의 적수였다면,
고린도에서는 인간적 지혜나 권력이나 집안 배경이 문제였다(고전 1:26-31).
상황 따라 유혹의 모양은 달라지지만, 복음 진리의 훼손이라는 위험은 똑같다.
말씀을 절별로 잘라 읽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는
본문의 긴 맥락이나 전체 상황을 따지는 일이 귀찮고 어렵다.
사실 위에 예로 든 몇 본문도 다수의 독자에게는 만만치 않은 경우들이다.
하지만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에는 그만큼의 수고가 필요하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늘 쉬운 것이 아니듯, 말씀 읽기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혼자 힘으로, 또 때로는 다른 이의 도움으로 상황을 생각하며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변
그만큼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이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