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7장 18-35절
세례를 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던 요한이
예수님의 행적을 보니 마음 속에서 과여 저분이 메시아인가 의구심이 들어
제자들을 보내 과연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묻는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펼치시는 사역들을 말씀하시면서 요한의 답을 대신한다.
그리고 요한에 대한 평가를 내리신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평가하신다.
더불어 믿음 없는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이 이어진다.
- 김진웅 목사의묵상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주류는 제쳐 놓고 주변인들을 주로 찾아다니십니다.
심지어는 이방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표시하는 듯 보이자,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묻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 맞으시냐고.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사야서를 포괄적으로 인용한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곧 맹인이 보며(사 29:18, 35:5)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35:6),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사 29:18, 35:5), 죽은 자가 살아나며(사 26:19)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사 61:1) 하라."
이 말씀에서 강조점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는 마지막 말씀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맹인, 못 걷는 사람, 나병환자, 귀먹은 사람, 죽은 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뜻의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는 이스라엘 누구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애통하는 자, 가난한 자를 찾아 구원한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는 바로 애통하는 죄인을 구원하는 메시아다.’
세례요한의 광야의 삶은 그런 메시아를 맞이하려는 준비였습니다.
메시아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오직 은혜로, 긍휼로 구원해 주시기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구하는 마음이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22절에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헬라어(프토코스)의 어원적 의미는 ‘뭔가에 눌려 쭈그러든 자’ 입니다.
프토코스의 자세를 가진 자만이, 죄인의 구원주 예수님을 복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자들을 찾아가시려고, 그런 자들이 찾아올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가 메시아의 징표였습니다(2:12).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라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더 큰 자가 없다고까지 칭찬한 세례요한조차도
예수님에게 의문이 들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가 맞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광야에서 주의 길을 평탄하게 하라고,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낮아져서 메시아가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외쳐 놓고서는 정작 자신은 그런 메시아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했다는 뜻입니까? 별 볼 일 없어 보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길은 낮아진 길, 겸비한 자들 가운데로 난 길이라고 여겼으면서 정작 그 길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높고 귀한 권세자의 모습이시기를 기대했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오해를 일축하십니다.
제자들이 십자가를 반대할 때 엄하게 꾸짖으셨던 것처럼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정치 지도자의 길을 결코 걷지 않으십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세력을 규합하여 큰 뜻을 펼치겠다고 나서는 지도자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에 너무 못 미치는 메시아였습니다.
완악한 세대는 자기들의 장단에 맞추는 메시아를 원합니다.
자기들이 피리를 불면 맞춰서 춤을 추고, 자기들이 곡을 하면 그에 따라 울어주는 그런 예수님을 원하였습니다.
이들은 삶의 방향과 가치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이 그룹을 예수님은 떠나가십니다.
가난하게 된 심령에서 나오는 믿음은, 애통하는 믿음은, 겸손하게, 겸비하게 긍휼만을 기다리며 엎드려 있는 믿음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실지라도 어떤 불만도 가질 수 없는 무익하고 가치 없는 죄인으로서 오직 은혜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그런 믿음이었고, 아들이 이미 죽어버린 나인성 과부의 심정이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믿음을 직접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믿음의 선봉이 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어서, 세력이 부족하여 물러서지만
예수님께서는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잡혀 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울한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지혜의 믿음입니다.
가난한 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자만
이 믿음,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발휘할 것입니다.
주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주님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도 주님은 여전히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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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이 그분 자신을 설명한다고 말씀하신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이까?"라는 요한의 질문에는 다소 회의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을 질병과 고통과 악귀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사역이
이미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믿음의 시야를 가릴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들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문을 떨치지 못한다.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이라면, 불의한 헤롯이 정권을 잡은 것과 자신이 억울하게 옥에 갇힌 것을
용납할리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눈앞의 현실이 소망을 가려도 여전히 옛적 하나님을 기억하며(사 46:) 실족하지 않는 것이 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함이 우리를 위대하게 한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셨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사람도 그보다 크다"고 하신다.
이는 예수님이 여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사람이 이를 경험하지 못한 요한보다 위대하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함게 고난을 받는 일인 동시에 그분의 영광도 공유하는 일이다(롬 8:17).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긍지를 지니고 있는가?
요한이 악하고 위선적인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향해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자(3:7-9),
그들은 '우리가 피리를 불 테니 부담스런운 말 그치고 유쾌한 말이나 전하라'고 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을 가까이하며 환대하시자(5:27-29),
그들은 '우리가 곡할 테니 경망스러운 짓을 그치고 엄숙해지라'고 한다.
체면과 기득권을 지키려고 일관성 없이 요한과 예수님을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요한의 사역을 통해서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든,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이 지혜자이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요한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길을 닦으며 살게 하소서
오늘 본문 중에 주석이 필요한 두 구절이 있다.
28절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처보다 크니라 하시니
26절:요한이 선지자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이유가 27절에 언급되어 있다.
요한은 다가오는 위기(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세례를 베품으로써 사람들을 준비하게 했다는 점에서
예언자 이상의 일을 했다(Manson). 한 마디로 요한은 '종말적 예언자'로서 그 지위가 특이했다(O. Cullmann)
28절: 요한의 활동 이후에 온 '시대의 변화'를 강조한다.
곧 메시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여,
그 나라의 축복과 은혜, 구원과 자유가 사람들에게 임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천국을 소유한 것이 마귀를 제어하는 권위보다 더욱 중요한 것처럼,
위대한 예언자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35절 :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부분은 예수님이 자신과 요한을 거부했던 당시 사람들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엄히 경고하는 내용이다.
당시 사람들은 32절의 비유의 내용대로,
어떤 놀이에도 흥미를 잃은 아이들처럼 하나님의 사자들의 말에 호응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배척하였다.
곧 그들은 금욕적인 요한은 자신들과 같지 않다고 해서 거절하고,
예수님은 천박한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세관원들과 죄인들은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다.
그들은 35절의 말씀대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로 이룩된 일임을 인정하는 '지혜의 자녀들'이었다.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로 받아들인 자들은 복이 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지혜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자신이 누구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는 자임을 깨닫는 자들이다.
자신이 쌓아온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으로 애통하는 심령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하나님이 보내신 분,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열린 마음,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이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난 것들임을 알아보는 믿음을 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진리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위대한 선지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묵상하는 아침이다.
그 영광은 이세상 어떤 것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어떤 가치보다, 지위보다, 소유보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그 나라의 시민이 되는 일이다.
그 가치를 알고 가슴에 품고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가?
찰라같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 성삼위 하나님과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하자.
세례 요한도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현실은 그렇게 사람의 판단력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요한의 말도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선입관, 편견에 사로잡히고 마음이 닫혀있는 자들에게는 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지 않는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게 된 것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참 지혜는 이것이다. 어떤 지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이다.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에 세상 모든 지식과 학문을 배설물처럼 여겼듯이 말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현실의 상황과 무게에 휘둘리지 말고 기쁘게 살아가자.
나는 천국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