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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미덕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7. 2. 13:40

[ 예수와 미덕 ]

 

영웅주의의 세계

 

기독교가 인류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바꾸어놓은 흔적은 뚜렷하다.

기독교가 출발한 로마세게는 영웅의 세계였다. 

압도적인 페르시아를 누르고 대제국을 건설한 젊은 황제 살렉산더의 이미지는 고대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알렉산더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으면서, 아킬레스를 흠모하며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의 귀족청년들이 알렉산더를 모델 삼아 인생의 꿈을 키웠고, 많은 황제들은 또 하나의 알렉산더가 되기를 원했다.

광활한 제국을 이룩한 로마제국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 재능이 일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미지는 더욱 강력한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의 문학작품, 역사서, 종교적인 제단, 석상, 기념비, 건축물 등의 갖가지 문화적 자원들이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데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팍스 로마나', '팍스 아우구스타' 사상의 정점에 그가 있었다. 

표면적으로 평화를 표방했지만, 그가 양아버지 줄리어스 시저의 복수를 명분으로 수많은 정적을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로마가 보장하는 평화는 제국에 반기를 드는 이륻에 대한 처절한 응징 위에 세워진 것이다.

'팍스 로마나'의 핵심에 있던 군주의 폭력성은 흠모와 숭앙의 대상이었다.

 

영웅 아우구스투스의 이미지는 로마사회와 이후 서구사회에 깊고 넓은 영향을 남겼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아우구스투스를 모델로 군사적 영광을 추구했다.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이 불러 온 참화를 말하면서

"역사상 가장 고약한 독약이 시저의 왕관으로부터 흘러나왔다"라고 했다.

인도 철학자 비샬 망갈와디는 이러한 폭력적 영웅이 사회의 모델이 되는 것은 

인류사회의 보편적 현상임을 힌두교나 이슬람 사회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쿠란에 평화를 지향하는 내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슬람의 출발이 군사적 영웅 무함마드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로마제국에 뿌리 내린 카톨릭교회는 이 영웅주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는 문화는 중세 기사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 영웅주의의 영향은 '기사도'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신사적으로 들리는 이름과는 달리 대다수의 기사들은 폭력적이며, 평민에게 억압적이었다.

기사들과 영주들 사이의 크고 작은 사적인 싸움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사들 간의 폭력적 갈등이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지적했다.

 

영웅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도전은 '하나님의 평화와 휴전'(Peace and Truce of God)운동에서 선명히 드러났다.

농민과 같은 비전투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특정한 성역과 사람들에 대한 폭력 행위를 금지했다.  

어길 경우, 교회는 가해자에게 파문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처벌하였다. 

현대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화와 인권운동에서 교회와 성당이 피난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시설을 성역으로 여기는 이런 전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기 때문이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의 휴전' 운동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토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가지 싸움을 중지하자는 약속으로 시작했다.

예배하는 주일이 평화의 날이 되는 것을 맛본 이들의 공감이 커져갔다.

날짜는 점점 늘어나 수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그리고 대림절이나 사순절과 같은 종교적 기간 동안에는

무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전쟁과 폭력을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제한하자는 시도였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4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경기를 통해서 겨우 꿈구던 제한적 평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의 평화와 휴전 운동에 모였던 헌신은 엉뚱하게도 십자군 전쟁을 독려하는 데 이용되면서 그 빛이 흐려졌다.

사실 '기독교적 기사도'라는 이상은 태생적 한계가 뚜렷했다.

기사도란 물리적 힘에 대한 숭상을 기본으로 하여 평민이 배제된, 기사라는 특정 계급만이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망가로아디는 폭력적 영웅주의의 이상이 결정적으로 와해되기 시작하는 시점을

14세기 후반에 시작된 '디보티오 모데로나'라는 영성운동에서 찾는다.

한국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저작이 이 운동의 열매다.

강력한 기사들의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면을 갈고 닦는 영성과 자기성찰이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제시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418년에 출판되었으니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100년이나 앞선 저작이었다.

종교적, 경제적 요인에 의해 중세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전에

이미 기독교는 근대적 인간이 지향해야 할 미덕이라는 정신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덕적 주체인 개인의 등장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마틴 루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이에 대답하면서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

"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신앙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이 선언은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독립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여기서 근대적 개인주의가 출발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중세 교권의 권위주의와 종교개혁의 단선적 대조에 기초하고 있다.

개인주의는 루터 이전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성경의 영향이 중요한 출발점을 형성한다.

 

"브루투스, 잘못은 별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

세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대사다.

세익스피어가 극중 카시우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의 영국인이 기원전 1세기의 로마인에게 하는 말이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개인은 국가라는 공동체에 귀속되며, 운명이라는 거대한 질서 속에 복속된 존재로 여겨졌다.

아리스도텔레스는 인간이 '폴리스적 동물'이라 규정했다. 

폴리스(도시국가)를 떠나서는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폴리스가 몸이라면 개인은 몸의 한 '지체'다.

몸이 없는 팔도 팔이라 할 수 있지만 아무런 기능도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했다.

로마 시대의 스토아철학이 개인의 자유를 중요한 미덕으로 본 것은 사실이다.

키케로,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외적인 환경과 운명에 의해 개인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림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스토아주의는 우주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운영된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가 궁극적으로는 자연법칙과 질서(logos)에 종속된다는 점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스토아 철학에서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운명을 수용하고, 거기에 맞추어 내면의 욕구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제한되었다.

로마 시대 개인의 정체서은 가족, 신분, 국가에 의해 규정되었고,

윤리적 선택의 주체라기보다 국가와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기독교의 등장은 이러한 관점을 변화시켰다.

기독교는 원죄론, 예정론과 함께 자유의지를, 공동체의 중요성과 함께 개인의 존엄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균형을 보였다. 

인간을 단순히 국가의 부속물이나 운명에 의해 정해진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구약성경은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고 함으로써 개인의 존엄을 강조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선언은

사회적으로 무시될 수 있는 한 개인의 중요성을 신적인 수준에 가져다놓는 급진적인 가능성이었다. 

바울 또한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라는 말로 신 앞에 선 개인을 강조했다.

 

초대 교부들의 저작에서도 개인이 윤리의 주체로 등장하는 과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보이는, 집요하다 할 만큼 철저한 자기성찰은

고대세계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개인적 투쟁이었다.

아우구수티누스가 자신의 어린 시절, 방탕한 청년기, 회심의 과정 등을 상세히 서술하는 자기이해를 추구하는 방식은

서구사상에서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보편적 인간 이해를 모색하는 전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수많은 고대문서 중에 유독 이 책이 개인주의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성에 와 닿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삶과 지적인 순례와 윤리적 갈등, 삶의 투쟁 자체가 성경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할 만하다.

특히 시편에 나타난 인간 실존의 한계와 위기, 그 속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세계를 형성한 자양분이 되었다.

이렇듯 개인을 윤리적 결단과 실행의 주체로 세운 기독교 신앙은 로마제국 안에서 눈에 뵈는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윤리적 목표의 달성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라고 했던 오현제 시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막을 내린다.

그의 아들 코모두스에서부터 혼란과 살육의 시대가 시작된다.

1999년의 영화 [글레디에이터]는 바로 이 부자간의 권력 이양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서두에서 코모두스는 부황에게

"나는 아버지가 요구했던 지혜, 용기, 정의, 절제는 갖추지 못했지만, 야망은 갖고 있었습니다"라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해한다.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등의 내용은 극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코모두스의 항변은 당시 로마사회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플라톤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지혜로운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는 플라톤이 말한 이상사회에 가장 근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국방, 경제 등 물적인 토대도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할 때, 탁월한 철학자가 최고 권력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사회는 도래하지 않았다.

철학자 황제는 지혜가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기는커녕 자신의 자녀를 덕으로 교육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리스-로마의 철학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깊은 침체에 빠진다.

 

코모두스가 말한 '지혜,용기, 정의, 절제'는 그리스-로마 사회의 4주덕으로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철학이 실패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열매가 돋보인다.

로마제국의 가장 탁월한 의사로 손꼽히던 갈레노스는

철학자이기도 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방대한 저서를 남긴 저작가이기도 하다.

2세기의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찰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 체계로 보았는데, 유대교와 기독교의 우주론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비하면 형편없이 조악하다는 점에서 수준 낮은 철학이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실지로 지혜, 용기, 정의, 절제의 삶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괄목한 만한 열매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로마 지식인의 눈에 관찰될 정도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맺은 삶의 열매는 확연했다.

그 열매는 그리스-로마 철학이 목표로 했으나 실패했던 덕목이었다.

 

'필로소피아'와 '필로티미아'

 

철학은 그리스어로 '필로소피아'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철학자들을 '지혜로운 자'라고 부를 때, 철학자들은 손사례를 치며 말한다.

"나는 지혜자가 아닙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필로소포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쉽게 풀어 슨 철학의 어원이다. 철학의 출발이 겸손에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날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겸손이 전제되지 않으면 철학이 추구하는 다른 미덕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코모두스는 자신에게 미덕 대신에 '야망'이 있다고 말하는 데, 

이는 당시 로마사회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철학은 필로소피아, 곧 지혜에 대한 사랑이며, 야망은 '필로티미아', 즉 명예에 대한 사랑이다.

명예에 대한 사랑은 고대의 영웅주의를 이끌어 오던 주동력이었다.

전쟁은 전사들 사이의 명예쟁탈전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그리스-로마 사회의 모든 가치가 발원한 수원과도 같았다.

이 책의 원제는 "아킬레스의 분노"다.

명예를 침범당한 전사의 분노가 고대세계 가장 중요한 작품의 주제였던 것이다. 

명예는 문자 그대로 생명보다 귀했다.

명예로운 죽음은 전사, 정치인, 철학자가 모두 귀감으로 여기는 바였다.

로마 귀족 남자들의 인생 목표는 하급 관리직부터 시작해서 정점인 집정관에 이르는

'명예의 사다리'에서 가능한 높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중요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을 위해 거행되는 개선식(triumphus)은 최고의 영광이었다.

로마가 전쟁에서 연전연승하고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명예의 사다리'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장군들의 야망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었다.

사회 전체의 에너지가 명예의 추구에 집중되었고, 그 핵심에 군사적 영웅주의가 있었다.

주전 1세기는 이 명예 경쟁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가히 야망의 시대, '필로티미아의 시대'라 할 만했다.

 

겸손의 미덕

 

이 야망의 시대에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시대의 추구와 정반대의 삶,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미덕을 보이셨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은 '지혜, 용기, 정의, 절제'의 4주덕에 들지 못했을뿐 아니라, 어떤 미덕의 목록에도 끼지 못했다.

델피의 금언(Delphic Maxim)에는 147개의 도덕적 권면이 나오는데,

"절제하라", "친구를 도와주라", "죽은 사람을 조롱하지 말라"등의 갖가지 미덕의 목록 중에도 겸손은 찾아볼 수 없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찬송에는 예수에 대한 파격적인 진술이 나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가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여기서 "자기를 낮추셨다"라는 표현에 사용된 헬라어 '타페이노오 헤아우톤'은

원래 '패배하고 굴욕을 당하다', '강자의 힘 앞에서 무릎 꿇다'라는 맥락에서 쓰였다.

이 단어는 주로 노예에게 사용되었으며, 권력자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은 곧 권력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현대 영어에서도 'humility'는 '미덕'을 뜻하지만,

'humiliate'는 '굴욕을 주다'라는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데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예수가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노예의 형체'를 가졌다는 의미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종(servant)이라는 단어가 선호되지만, 원래 의미는 '노예'(slave)에 더 가깝다.

심지어 역사적 예수의 사회적 신분은 노예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철저한 낮아지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당시의 세계관을 전복하는 선언이었다. 

예수는 명예의 사다리 꼭대기를 차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빌 2:10)

하셨다는 선언은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혁을 말한다.

 

이 선언은 로마제국의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로마인들은 명예의 사다리라는 위계질서 속에서 이해했으며,

신이 존재한다면 그 사다리의 가장 곡대기에 위치한 황제가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황제는 제국의 '대제사장'(Pontifex Maximus)이었고,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가장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주'로 선포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로 소개한다.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는다는 차원을 벗어나서, 

기존의 명예체계를 완전히 두집음으로써

약한 이가 귀하게 여김을 받는 새로운 세계질서을 구축해나가는 행위였다.

 

그의 시도는 기독교 내에서도 많은 도전을 받기도 했다.

자신들의 능력을 자랑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의 도전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고후 11:30-33)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을 벗어나 도망갔다는 '자랑'의 배경에는

'코로나 무랄리스'(Corona Muralis, 성벽 왕관)라는 군사적 관행이 있었다.

고대의 공성전에서 포위된 성을 공격할 때 성벽에 가장 먼저 올라가

공격군의 깃발을 성공적으로 꽃은 병사에게 수여되는 명예였다.

광주리를 타고 성벽에서 내려와 도망가는 바울의 모습은 이 용맹한 군사의 모습과 정반대되는 이미지다.

 

지혜, 용기, 정의, 절제는 당시 사람들이 철학(필로소피아)을 통해 간절히 바라던 미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의 철학은 그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덕을 향한 염원을 더욱 강력한 야망(필로티미아)의 물결이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예수의 복음이 전해졌다.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한 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복음을 따라 사는 공동체에 의해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어떤 이가 이상적인 인간인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

'무엇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덕인가?'에 대한

기독교의 답변과 모범이 사람들을 설득해갔다.

당시 사람들이 좀처럼 생각하지 못한 '겸손'이 미덕으로 꼽힐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덕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성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 가운데서 그리스-로마의 필로소피아가 본래 목표했던 미덕인

지혜, 용기, 정의, 절제의 열매도 튼실하게 맺혀갔다.

 

 

--- 박영호 목사 (포항 제일교사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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