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여성
1. 여성의 자기실현, 그때와 지금
"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하니"(눅 11:27)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을 때, 그 말씀에 감동을 받은 한 여인이 있었다.
감격한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이는 1세기 유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에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칭송을 받으며 뜻밖의 대답을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
이 대답은 복 있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선언이기보다
그 순간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응한 여인에게 주신 특별한 메시지였다.
당시 유대 땅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던 의미였을까?
그들에게 허락된 자아실현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유대 사회에서 여성들은 사회적, 종교적 제약 속에서 살아갔으며,
그들의 역할은 주로 가정 안에서 한정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들은 이 여인의 가슴은 뛰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나도 저런 아들이 있었으면..."이라는 엉뚱한 소원으로 향한다.
당시 여인이 꿈꿀 수 있는 의미 있는 삶이란 아들을 낳아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 여인의 꿈은 시대의 제약 안에 갇혀 있다. 예수님은 그 한계를 깨뜨리신다.
"당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성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자리를 열어주는 해방 선언이었다.
주후 2세기 초 유대교의 한 랍비는
"자기 딸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자는 마치 그녀에게 방종을 가르치는 셈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예루살렘 탈무드에는
"여성의 지혜는 몰레에 있다. 여인에게 토라를 넘겨주느니 차라리 불태워버리는 것이 낫다"는 말까지 등장한다.
물론 이와 같은 표현은 당시 유대교 내 한 극단의 입장일 수 있다. 좀 더 개방적인 시각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의 토라 공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다. 한국의 지폐에 초상이 들어간 유일한 여성이 신사임당인데,
많은 사람이 그를 '아들을 잘 키운 현모양처'로 기억하고 있다.
현대 한국 사회도 여전히 여성이 스스로 성취를 이루기보다 남성, 특히 아들을 통해
그 의미를 찾으려는 오래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맥락에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눅 10;38-42)는 혁명적이다.
부엌에서의 일과 예배를 섬기는 일이 덜 중요하고 더 중요한 것으로 나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섬김을 귀히 보신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여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며,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될 수있음을 강조한다.
2. 성경이 갖는 힘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아래 빠르게 성장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복음의 혁명적 성격에 있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된 이후,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여성들의 삶이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사회에서 여성은 가부장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놓여 있었다.
여성은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거나 서명할 수 없었고, 반드시 남성 자유인인 법적 대리자가 필요했다.
그리스 사회는 더욱 폐새적이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성은 우월하고 여성은 열등하다고 말했으며,
노예는 합리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여성은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지만 권위가 없으며, 어린이들은 불완전하다고 했다.
그는 또한 여성이 남성보다 사고 투성이며, 더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편견은 기독계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성경과 과학" 편에서는 교회가 천둥설에 집착한 배경에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았다.
중세 그리스도인들의 여성관에도 그리스 철학이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여성에 대해 매우 차별적인 견해를 남겼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아퀴나스는 요한복음 주석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다르게 해석했다.
그는 두 여인이 사도의 직무'를 수행했다고 보았으며,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의 사도'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
성경이 갖는 힘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담고 있는 데서 나온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성경을 따라 사는 이들은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유진 피터슨은 기독교 영성의 진수를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극적인 변화를 내어놓지는 못하더라도,
방향이 분명하고 인내가 있다면 어느덧 그 목적지에 가까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억압적인 구조와 문화의 일부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예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해방의 기운이 분출할 때 사람들은 다시 성경을 읽었고,
성경이 비추는 빛 아래서 한 걸음씩 전진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이나 가변적 문화가 아닌 '기록된 말씀'이 신앙의 중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성경이었다.
3. 초대교회의 여성들
성경은 압도적인 가부장적 문화 아래서 기록되었음에도 여성들의 활약에 대해 많은 증거를 남긴다.
누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열두 제자와 동행한 여성들을 언급한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2,3).
이 여성들은 예수님과 함께 공적인 사역에 동참하는 것, 특히 함께 여행하며 일하는 것은 오해받기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중요한 동반자였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런 파격적인 행보는 예수님 시대에 잠시 있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활동기에도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고전 9:5) 다니는 전도자들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여성들의 리더십을 인정한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겐그레와 교회의 일꾼인 자매 뵈뵈를 추천하며,
그녀가 바울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보호자가 되었음을 언급한다.
또한 바울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며,
그들이 바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고 기록한다.
여성인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온는 것은 그녀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경에서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가 가장 길게 기록된 사람은
바로 요한복음의 사마리라 여인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유대인 남성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지만
결국 믿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고민 속에서 돌아간다.
뒤이은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즉시 그를 전하는 전도자가 된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깊이 만나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가셨고, 그들을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포함시키셨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여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가 다가와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했다.
마리아는 인류를 대표해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또한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임산부의 만남 역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두 여인은 각각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생과 사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받았다.
예수의 부모가 난 지 팔 일 되는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을 방문한 장면도 인상적이다.
이 할례는 남자 아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아기를 축복하고 예언하는 일에 남성인 시므온뿐만 아니라 여선지자 안나도 참여한다.
이 균형은 예수가 가져올 세상의 청사진을 보여준다.
하나님 백성의 입문 의식인 할례는 세례로 바뀌고
그 안에서 노예도, 여자도, 이방인도 같은 자격을 얻는다(갈 3:27,28).
또한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목자인 남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셨다.
이어서 똑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한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다. 놀라운 균형 감각이다.
누가복음에는 여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많이 드러난다.
'불의한 재판장에게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눅 18;1-8),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눅 7;11-17),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눅 21:1-4)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는 예수께서 여성들을 소외된 존재로 보지 않으시고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대하셨음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신 것도 주목할 만하다(18절).
성령은 특정 계층이나 성별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임하신다.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오는 것은 역사의 진보 끝에, 전에 없던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창 1:27)하셨다고 말한다.
여와 남이 모두 한없이 존귀하다는 것은 창조 때부터의 원리였다.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마리아, 유니아와 같은 여성들의 헌신을 언급하고,
유니아는 사도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로 존경받았다고 말한다.
유니아는 남성 사도들 사이에서 탁월한 리더로 인정받았으며,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따랐던 인물로 묘사된다(6,7절).
이는 여성이 초기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4. 로마의 결혼제도와 초기 기독교
신약성경은 당시 결혼제도가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준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롬 7:2)라는 말은 율법을 결혼관계에 비추어 설명한 예시로,
초대교회의 문화적 세계 안에서 결혼제도의 폭압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를 믿고 해방을 경함한 여자들이, 폭압적 결혼제도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한 흔적들이 많이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복음에 헌신하려는 여성들도 많았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일곱 일꾼 중의 하나님 빌립의 딸 네 명이
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예언 사역을 하고 있다고 보도한다(행 21:8,9)
남편과 사별한 경우, 당시 사회에서는 재혼의 압박이 상당했다.
아우구스투스는 2년 안에 재혼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는 법을 만들기까지 했다.
초대교회에서는 과부로 남는 것이 하나의 가능한 선택일 뿐 아니라, 돌봄받고 존경받기까지 했다(딤전 5;1-10).
3세기의 로마교회는 1500명의 과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했으며,
4세기의 안디옥교회는 3000명의 가난한 이들을 지원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과부와 미혼 여성들이었다.
외경에 속하는 바울행전은 '테클라'라는 여인의 행적을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하고 예수를 따르는 길이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삶의 방식이었음을 보여준다.
결혼 연령 또한 여성의 인권과 관련한 중요한 주제다.
2018년의 영화 "가버나움"에서 가장 크게 관객들의 공분을 일으킨 장면은
아직 어린 티가 체 가시지 않은 딸을 부자 남자에게 시집보내려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로마시대에는 이런 조혼이 일반적이었다.
12세가 되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법이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권고사항일 뿐이었다.
많은 소녀에게 강요된 성관계는 두려움이었고, 조혼이 불평등한 부부관계의 한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종교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키스 홉킨스의 연구를 인용하여 말한다.
"이교도는 기독교인보다 만 13세 미만에 결혼하는 확률이 세 배나 높았다.
이교도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여성이 만 14세 이하에 결혼한 데 비해 기독교인의 해당 수치는 20%였다.
반면 거의 절반(48%)에 달하는 기독교인 여성이 만 18세 미만까지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이에 비해 이교도의 해당 수치는 3분의 1(27%)이었다."
결혼생활 안에서 부부 관계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기준을 형성해갔다.
당시 사회는 여성에게 정절을 요구했지만, 남성의 성적 방종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남편에게도 같은 정절을 요구햇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 7:4)라는 원칙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교회의 지도자에게 요구한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 3:2)라는 요건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모범이 되었으며 , 초기 공의회들에서도 이 원칙을 지켰다.
한국교회에 와서도 초기에 이러한 원칙을 엄격히 지키려는 노력은 치열했다.
축첩을 금지하는 교회의 원칙은 여성들을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려는 노력이었다.
모순적인 것은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이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결혼관계에서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지,
교회 지도자를 남성으로만 제한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성경 전체의 정신과 시대의 맥락을 놓친 문자주의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예다.
5. 한국교회의 역사와 우리의 과제
이렇듯 한국교회에서 성경적 여성상을 실현해가는 일은 여전히 씨름 중인 과제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이 눈부시게 늘어나고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질 뿐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에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냈다.
초기의 역동적인 부흥의 원인을 꼽아 보자면
억눌려 있던 여성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해방을 경함하고 잠재력을 발휘했던 점을 놓칠 수 없다.
당시 많은 여성이 '전도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복음 전파에 헌신했다.
이들은 성경과 전도 책자를 팔면서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고,
그들의 헌신은 교회 성장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삼덕 여사가 그 예다.
평양의 전삼덕 여사는 남편이 진사 벼슬을 지낸 야반 가문 출신이었으나,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권유로 세례를 받은 전삼덕 여사는
"여자는 남자와 대면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풍속"이라며 세례에 대해 망설였다.
이에 스크렌턴 선교사는 방 가운데 휘장을 치고 머리만 내밀게 한 후 물을 부어 세례를 베풀였다.
이렇게 받은 '휘장 세례'는 한국 여성 신앙사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이는 여성들이 숨어 있거나 휘장을 찢지 않고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전삼덕 여사는 세례 후 전도부인이 되어 전국을 돌며 성경을 전하며 복음을 전파했고,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평양에서 매년 개최되는 사경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말씀의 훈련을 쌓아갔다.
은퇴 후에도 건강이 허락되는 하나님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남존여비 사상이 깊은 지역에서도 여성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무료로 여자아이들을 가르쳤다.
그의 영향 아래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많은 목사와 신학자가 배출되었다.
1925년 2월 27일 학동교회에서 근처 9개 교회가 연합하여 전삼덕 여사의 전도 3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를 알게 된 후로 나는 자주한 인간이 되었다."
2천 년 전 인습에 묶여 있는 한 여인을 향하여 여성도 하나님나라 운동의 당당한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선포하신 해방의 음성이 조선 땅의 한 여인에게도 들린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해방의 복음을 오늘의 삶으로 살아내야 할 책임이 있다.
---- 메일 성경, 박영호 목사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