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8. 목요일
창세기 5:1-32
- 아담의 계보 시작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대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 셋의 후손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팔백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에녹의 동행과 승천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노아의 출생과 아들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
아담의 족보에 가인과 아벨은 없다.
아담과 후손들은 구백 년 전후를 살면서 많은 아들과 딸들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개된 이름은 아들 한 명들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녀들을 낳고 살다가 죽었더라'가 그들 인생의 전부이다.
아담에서 셋과 에노스로 그리고 에녹과 노아가 기억될 이름이다.
얼마 전 우리 집 족보를 들춰 본 적이 있다.
나는 족보에 올라가지 못했고 두 형님만 올라가 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무렵이라 진행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아담이 창조되고
아담의 형상을 닮은 셋이 태어났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말해준다.
성령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의 족보에 내 이름이 올라가게 하옵소서.
영원히 기록된 이름, 기억될 이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원합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게 도와주소서.
노아처럼 이웃을 안위하는 삶 살게 하소서.
-----------------
[ 죽음 속에 빛난 동행 ]
아담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계보 속에 하나님의 형상과 죽음의 현실이 교차합니다.
그러나 에녹의 동행과 노아의 탄생은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의 빛을 봅니다.
(1-20절)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복을 주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의 세대는 죄의 영향 아래 놓였고,
그 결과는 "죽었더라"는 반복된 기록으로 드러납니다.
인간은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나,
동시에 죄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한계 속에 갇힌 존재입니다.
'존엄'과 '비참'의 긴장 속에서 갈팡질팡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죄와 죽음의 엄연함 앞에서도 절망하거나 삶을 비관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소중히 가꾸며 그 형상이 완성될 날을 소망합니다.
비록 죄가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죽음이 우리를 덮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죽음을 이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21-24절)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족보마다 반복되던 "죽었더라"의 후렴 속에서, 그는 유일하게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호흡을 맞추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기쁨의 길입니다.
작은 믿음의 걸음 하나가 모여 영원을 여는 문이 되고, 그 걸음은 마침내 하나님 품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은 죽음을 운명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은 동행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곧 죽음을 넘어서는 길입니다.
(25-32절)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하며 "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수고와 눈물로 가득한 땅에서 그는 하나님이 예비하실 위로와 새 출발을 바라보았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심판을 넘어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이는 절망의 끝에서도 소망을 놓지 않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길임을 증언합니다.
오늘의 현실이 무겁고 미래가 불투명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로와 새 희망은 반드시 주어집니다.
믿음은 절망에 지지 않고 절망을 넘어 소망을 안겨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영원한 생명과 참된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
[ 유일한 삶의 이유 ]
찬송가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4:1절을 보면 하와가 가인을 낳고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 짓고 있습니다.
‘득남하였다’가 히브리어로 ‘카니이트 이쉬’인데, 앞의 발음이 카인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문자적으로 ‘여호와와 함께 득남하였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셔서 득남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짓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 인격, 생명을 규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인격을 부여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동물의 이름을 아담이 지었고, 하와의 이름도 아담이 지었습니다.
아담이 지은 하와의 이름은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지은 이름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를 아담과 하와는 깊이 새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뱀에게 하신 말씀,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머리를 밟아버릴 후손, 메시아로 오실 후손을 기대하며
아담과 하와는 동침을 하였고 태어난 아들에 대해 소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인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가인은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얻은 아들의 이름을 ‘아벨’이라고 짓습니다.
아벨은 ‘공허’란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실망이 컸다는 것이지요.
설상가상으로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벨은 죽고, 카인은 쫓겨났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셋은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아담과 하와가 충격을 딛고 일어나서,
다시 아이를 낳는 일을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점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래도 아들을 낳아야 해’ 이러면서
여자의 후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아들을 낳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출발한 족보가 셋의 족보입니다.
아담의 후예 즉 셋의 후예들의 삶에 대한 묘사를 보면 너무 단조롭습니다.
‘낳았고 ... 낳은 후 ... 지내며 ... 낳았으며 ... 죽었더라.’ 지루하게 반복됩니다.
도시를 건설하고 목축업을 일으키고 예술혼을 불태웠으며, 철기 문명을 개척했던
카인의 후예에 비하면 너무 무의미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조롭게 한 가지만을 붙들고 사는 자들이
아담의 정통 계보를 잇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1절).
훨씬 화려해 보이는 가인의 계보는 정통 계보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였지만
성경은 그 인생의 가치를 계산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여기며,
그들의 인생 년수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2:22, 표준새번역]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그의 숨이 코에 달려 있으니, 수에 셈할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셋 계열의 계보를 잇는 자들이 얼마나 살았으며,
그 사는 동안 무엇을 하였나를 숫자로 세며 계산하는 것과 대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계보, 셋 계열의 계보에서는
성을 쌓고 문화를 진흥시키는 일은 하나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기보다, 그런 일에 가치를 두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이들이 하는 일은, 수백 년을 살아가며 한결같이 하는 일은 자녀를 낳는 일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낳는 일입니다.
그렇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이
셋 계열에 속한 자들에게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분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는 그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치가 그 정도라면, 우리는 예수님 잘 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분이십니다.
51%? 아닙니다. 90%? 아닙니다. 내 인생의 99%도 아닌
100%가 되심이 마땅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100%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가정도 있고, 친구도 있고, 생명도 있고, 즐거움과 평안도 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설사 존재하더라도 유의미할 수 없음이 진실입니다.
그래서 셋의 후예들은 100% 주 예수님께 삶의 의미를 두고,
오직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일에 가치를 두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여자의 후손에 유일한 의미를 두고 사는 인생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들이 몇 살을 살았으며 몇 명의 자녀를 낳았는지를 다 세고 계십니다.
그들의 머리털 하나까지 다 헤아리며 세밀히 보살피십니다.
[누가복음 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주님,
다시 오실 예수님 바라보는 것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이 되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의 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생명을 가꾸고 세워가는 일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되게 하옵소서.
믿음의 자녀가 되고 믿음의 자녀를 낳는 일이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여기 있는 유일한 목적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2026년 영성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방주,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 (0) | 2026.01.10 |
|---|---|
|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이 살 수 있다. (2) | 2026.01.09 |
| 아벨의 믿음 (1) | 2026.01.07 |
| 수고의 징계 (1) | 2026.01.05 |
| 나는 피조물인 인간이다 (1) | 2026.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