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아벨의 믿음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1. 7. 10:15

2026.1.7. 수요일

창세기 4 : 1-26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의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재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징계와 보호의 약속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처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니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따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며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 가인의 후손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 아벨 대신에 셋과 에노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질투와 시기가 싹트고 미움은 커져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든다.

 

하나님은 왜 가인과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을까?

아벨과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본문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후반부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고 그런 자세로 제물을 바치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을 것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아벨은 죽음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었다.

 

가인에게 내린 형별은 무서운 것이었다.

가인이 말한 것처럼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했다.

정착하여 농사를 짓던 사람이 유리하는 자가 되었으니 가인은 무엇을 하고 살아갔을까?

너는 유리하는 자가 되라고 하나님이 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성을 쌓고 정착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살아가는 그의 후손들은 죄를 짓고도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뻔뻔스러움과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철면피함을 보게 된다.

 

아담은 셋을 낳으면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자식을 주셨다고 고백한다.

아담의 형상을 닮은 아담의 계보를 이어갈 새로운 아들임을 고백한다.  

에노스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주관하심으로 구원 역사는 중단없이 이루어져 간다.

 

나는 가인의 후예인가, 아벨의 후예인가?

가인의 문명과 문화를 추구하는가?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사이에서 살아가는 죄인의 삶이다.

 

성령님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 머물며 살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코람데오 !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악된 본성들이 정결하게 되고

오직 성령님의 총만한 내주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해 주소서.

아벨의 피가 헛되지 않은 것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삵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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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아우를 찾으십니다 ]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깨뜨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예배의 자리에서조차 형제관계가 파괴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1-2절)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가 자손을 낳고 생명을 이어 가게 하십니다.

하와는 해산하는 수고 속에서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가인을 낳고 "여호와로 말미암아"(주님의 도우심으로) 아들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3-7절)

하나님은 제물보다 사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제물을 바친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거절하셨다고 낯 빛을 바꾸며 화를 낸 데서

가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없이 그저  동생과 경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것은

'수소의 고기와 염소의 피'(시 50:13)가 아니라, 

'감사로 제사는 드리는 ' 예배자입니다.(시 50:23).

 

(8-10절)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오셔서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서로 돕고 보살펴 주어야 할 형제의 안부를 묻고 계십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우의 피를 보고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곳곳에서 갖은 폭력을 당하며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의 억울한 소리를 우리가 듣기를 원하십니다.

 

(11-15절)

가인의 죄를 징계하시며 땅에서 방황하는 자로 사는 벌을 내리시지만,

그에게 표를 주어 해를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5-26절)

죽은 아벨을 대신해 셋을 주시고 그를 통해 예배하는 백성을 다시 세우십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형상인 아벨을 제거했지만,

하나님은 셋과 에노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계속해서 되살려 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죽음과 함께 소멸하지 않고,

죽음을 기억하는 자들을 통해 계속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예배자로 사랑과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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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의 후예와 문명 ]
찬송가 424장 아버지여 나의 맘을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창세기 4:1-15절까지를 여러 번 읽어보아도 도대체 아벨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벨의 제물이나 제사의 형식이 가인보다 나은 것이 아니고, 

제사 드리는 믿음이 나아서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뜻인데, 

아벨의 무엇을 보고 ‘나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11:4의 끝부분이 힌트를 줍니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이 구절의 문자적인 번역은 '그가 죽었으나 그것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입니다.

아벨의 죽음이 뭔가를 알려주고 있다고 하십니다. 뭘 알려준다는 말씀일까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11:4절도 아벨의 믿음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러니 죽음으로써 아벨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믿음입니다.

즉 히브리서 11:4절의 끝부분은 아벨의 죽음이 그의 믿음을 강력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벨의 믿음은 자기를 기꺼이 죽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한 그리스도의 믿음을 닮은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을 히 12:24이 이렇게 말합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벨의 죽음보다 더 나은 믿음의 순종이라는 의미입니다.

히 12장은 믿음의 순종, 피흘리기까지의 복종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아벨은 아직 육식이 허용되지 않았을 당시(창 1:29-30)에 양을 치는 것을 업으로 삼았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야 육식이 허용되었으니(창 9:3-4), 

아벨이 살아 있을 당시 양의 쓸모는 가죽옷과 제사밖에는 없었습니다. 

인구가 극히 적은 때였습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아담의 후손들이 꽤 있었겠지만 기껏해야 몇십 명, 몇백 명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가죽옷과 제사 용도로 양을 찾는 사람이 1년에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육식은 금지되어 있었고 그래서 양고기를 곡식과 교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양치기란 직업은 참 배 고픈 직업이었습니다. 

아벨은 생계를 이어가기조차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입고 나온 

가죽옷(아마도 양가죽 옷이었을 것입니다)의 소중한 의미를 지켜가는 사명감으로 

아벨은 양치기를 고집했던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뜻을, 

양의 피를 흘려 드리는 제사를 통해 되새기며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홀로 양을 기르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목적의 제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로 잘먹고 잘살려는 시도를 내려놓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였기에 죽음도 순순히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아벨의 피가 말하는 것은 ‘여기 죽음을 믿음으로 순순히 받아들인 자가 있다’는 선포입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반면 가인은 자기를 세우는 것에 골몰하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께로는 전혀 향하여 있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가 어떻게 잘 사느냐, 어떻게 자신의 위상을 높이느냐가 가인의 전적인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사가 열납 되지 않았을 때, 근심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런 가인에게 아벨의 믿음의 태도는 자신의 치부를 계속 드러내게 하는 껄끄러움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습니다. 

가인은 자기를 높이는 시도를 포기하든지 아벨을 죽이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벨을 죽인 것에 대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도 가인의 관심사는 여전히 ‘자기’뿐입니다. 

‘자기’, ‘자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가인이었습니다.

이 가인의 후손들에 의해서 문명이 일어납니다. 

문화가 발달합니다. 청동기, 철기 시대가 열립니다. 

인간의 자아실현의 노력들입니다.

[누가복음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목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야발입니다. 

아벨과는 다른 목적으로 목축이 시작된 듯합니다.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죽옷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을까요? 

그래서 가죽옷과 털만을 팔아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된 것일까요? 

어쩌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임의로 육식을 시작한 것 아닐까요...

라멕의 뻔뻔함은 죄인이 몰두하는 ‘자기 사랑’의 절정입니다. 

죄에 대한 회한, 후회는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그 죄로 인해 자기가 받을 형벌이나 손해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 

벌만 받지 않으면 된다는 태도, 복만 받으면 된다는 마음이 라멕에게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라멕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 ‘의’와 ‘사랑’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세상에 문화와 문명이 들어오고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이 찜찜합니다. 

'과연 문화는 중립적인 것일까...? 

 우리가 별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은 과연 중립적인 것일까...?'

인류 문명을 일으킨 가인의 후예들 중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과시하는 일에 몰두한 자들에게서는 경건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아들 셋에게서 후손이 태어나기 시작한 이후에야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벨과 셋의 계보를 잇는 자들 외의 모든 아담의 후손은 ‘가인의 후예’였습니다. 

아담에게 가인, 아벨, 셋 외에도 아들들이 더 있었을 텐데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은 

그들은 뭉뚱그려 ‘가인의 후예’의 범주에 드는 자들이었다는 뜻입니다.

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의 문자적인 번역은 '셋 그에게도 아들이 낳아졌고'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표현입니다. 

셋의 후예에게 하나님께서 그 출생부터 특별히 간섭하는 은혜를 베푸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인이 죄에서, 자기를 주장하는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그 후예들의 역사가 이를 확인해 줍니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재화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그렇습니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결코 중립적인 가치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후예는 결코 중립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선하게, 어떤 때는 악하게 역사를 꾸려가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후예의 역사는 일관되게 죄인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초반부터 가인의 이야기, 가인의 후예들의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십니다. 

아벨의 이야기는 짧고 가인의 이야기는 깁니다. 

가인의 후예들의 이야기는 화려하고, 아벨(셋)의 후예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밋밋합니다. 

애 낳는 이야기밖에 없습니다(5:1-32).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왜 우리의 초점을 죄인들의 이야기에 맞추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 이야기의 당사자가 우리 자신인 것을 말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바로 가인이야! 네가 가인의 후예야. 

네가 즐기며 누리고 있는 문명이 바로 가인의 문명이야.”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주님, 

'자기'밖에 모르는 이 가인이 바로 ‘나’라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 가인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징계하시고, 

징계 가운데서 회개할 기회를 ‘주고 또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끝까지 회개를 기대하시며, 가인에게 보호 장치까지 붙여주시는 하나님, 

최소한 살아 있어야 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어떻게든 죽임을 면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속히 돌이키도록, 온전히 돌이키도록 지키시고 권고하여 주옵소서.

살아 있을 때 돌이키게 하여 주옵소서.

문명의 해악을 잘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문명의 이기들에 취하여 그 속에 깃든 죄악의 요소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그것들에 들어 있는 악한 풍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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