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덮음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방심은 금물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1. 13. 05:37

2026.1.13. 화요일

창세기 9 :18-29

 

- 노아의 허물과 아들들의 반응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 축복과 저주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의 죽음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

민족이 갈린다.

그 갈림의 발단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행동이 단정하지 못한 행동이고

결정적인 동기는 가나안의 방자한 행동으로 노아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방주에서 나온 후 보인 삶과 행동이

방주에 들어가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신 이유가

홍수 사건으로 인한 삶의 고달픔과 허무함, 고독과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수확 후 기쁨을 누리며 긴장감이 풀어져 절제하지 못한 방심인가? 

 

인간은 참으로 완고한 존재이다.

변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고 힘들다.

잠시 바뀌고 새롭게 된 것 같아 보여도

시간이 지나거나, 어떤 상황을 만나면 원래 본성이 들어난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의 마음이 조석으로 변하는 변덕쟁이가 아닌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생각들과 행동들이 그대로 있음을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거듭났다고 믿으면서도

우리의 삶의 모습은 술취한 노아와 아버지의 흉을 들어내는 함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 인간은 어찌할 수 없는 참으로 곤고한 존재이다.

 

성령 하나님

나의 죄성을 어찌할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탄식하며 고백합니다.

저 스스로 나를 깨끗게 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인간의 한계,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 무능하고 무기력한 피조물일 뿐임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거듭나고 거룩해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만이 나를 정결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고백하오니

저를 깨끗케 씻어 주소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내 안에 있는 더럽고 추한 것들을 다 씻어 주시고 정결한 삶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오늘도 깨어 있어서 말씀을 붙들고 자신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게 도와 주소서.

하나님의 덮어 주시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만 내가 살고 살아갈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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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덮음과 드러냄, 복과 저주의 길 ]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인류가 온 땅에 퍼져 나갑니다.

그러나 노아가 취함으로 수치를 당했을 때, 

이를 대하는 아들들의 태도에 따라 후손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 20-21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이자 완전한 자'(6:9)라 불리던 노아도 

홍수 이후 포도원을 가꾸다가 술에 취해 실수했습니다.

방주 속 긴 고생 끝에 맞이한 평안의 자리에서 그는 방심했고,

그것은 곧 수치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누구라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도 안일함에 빠지면 넘어지고, 영적 승리 후에도 방심하면 유혹에 빠집니다.

무너짐은 폭풍우 속보다 오히려 평안한 일상에서 더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 후의 삶, 평안 속의 태도를 더욱 깨어 지켜야 합니다.

 

(22-23절)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본데서 그치지 않고, 수치를 확대하고 유표했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질 치며 아버지의 하제를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두 태도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함의 태도는 타인의 허물을 조롱거리로 삼는 인간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의 태도는 경건한 자가 지녀야 할 존중과 사랑의 본을 보여 줍니다.

형제와 이웃의 허물을 볼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어떤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염려하는 체하며 그것을 퍼트리고 조롱합니까?

아니면 먼저 그의 수치를 가리고 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까?

전자는 죄의 본성을, 후자는 은혜를 입은 의로움을 따르는 것입니다.

 

(24-27절)

함은 수치를 드러냈지만, 셈과 야벳은 허물을 덮었습니다.

성경은 이 작은 태도의 차이가 미래 세대의 복과 저주로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직장, 교회, 가정, SNS와 대화 속에서 우리는 쉽게 타인의 약점을 드러내고 평가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죄보다 회복을 기뻐하시며,

흉보고 말을 옮기는 자리보다, 사랑으로 덮고 기도하는 자리를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복은 '덮어 주는 사랑'에서 흘러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수치를 십자가로 덮으셨듯이, 

타인을 보호하고 살리는 삶이 복됩니다.

타인에게 너그러울 때 하나님도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십니다(눅 6:37-38)

 

평안 속에서도 방심하지 않게 하시고, 허물을 덮는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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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덮음의 은혜 ]
찬송가 283장 나 속죄함을 받은 후

무지개 언약을 주시면서 강조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구름입니다. 

무지개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답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구름’으로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는 ‘아난’입니다.

이 단어의 원뜻은 ‘덮다’입니다. 

그러니까 구름은 본래의 뜻이 ‘덮는 것’입니다.

‘구름 속의 무지개’는 ‘덮음 속에 나타난 무지개’의 뜻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무지개 언약의 핵심은 무지개가 아니고 구름입니다. 

구름 즉 덮음 속에 무지개를 보여주심으로써,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덮음이 될 것’이라는 언약의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그 물을,

이제 덮음의 도구로 사용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무지개 언약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개를 언약의 증거로 주시면서, 

“구름 속에 두겠다(13절).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14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16절)”라는 

 말씀을 반복적으로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본래부터 덮음의 물이 아닌, 쓸어버리는 물로 

이 세상을 정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물을 덮음의 도구로 사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먼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을까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할 뿐이어서 

심판으로, 징계로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을 하신 것일까요? 홧김에 그러셨을까요?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르치고 확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무지개 언약, 덮음의 언약, 은혜의 언약을 

유일한 구원의 언약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확 쓸어버리면, 

겁에 질려서라도 죄악에서 돌이킬 것 같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다 쓸어버려도, 의인 노아와 그 가족만 남겨도, 

거기에서 또 악이 싹트고 

여전히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할 뿐인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홍수 심판은 '홍수의 물로는 안 된다. 덮음의 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고육지책이십니다.

그런데 이 가려주고 덮어주는 언약, 무지개의 은혜 언약을 

멸시하는 행태가 노아의 한 아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폭로하고 가십거리로 삼은 아들 함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를 나타내십니다.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닙니다. 

덮음의 은혜를 모르는 자로 행세했기 때문입니다. 

덮음의 은혜 받은 자의 태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함이 받은 저주가 너무 가혹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친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런 저주를 하다니...?' 

홧김에 내린 저주가 아닙니다. 

화가 나서 그랬다면 가나안을 저주하기보다 직접 당사자인 함을 저주해야 합니다. 

노아가 홧김에 아들을 저주할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교만한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로부터 6:9절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

다니엘, 욥과 같은 경건한 선지자로 인정받지(겔 14:14, 20) 못했을 것입니다.

노아가 저주(?)한 대상은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이었고

이 가나안은 가나안 족속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에녹(유 1:14-15)이나 라멕(창 5:29)처럼 선지자로서 예언을 행한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언을 전한 것이지 자기의 감정을 쏟아낸 것이 아닙니다.

25절에서 ‘원하노라’로 번역된 부분이 노아가 감정이 상해서 아들을 저주하였다는 오해를 하게 만듭니다.

‘원하노라’는 뜻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습니다. 27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5절의 문자적인 번역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경고하신 것입니다. 

덮음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덮음의 은혜를 모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덮음의 은혜를 모르는 자의 후손이 어떻게 될지를 미리 내다보시고 예언을 주셨습니다. 

덮음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해, 무리하게 보이는 저주까지 동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덮음의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을 덮어주지 않고 그 수치를 까발리고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은혜받은 자는, 은혜 언약을 믿는 자는 마땅히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덮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덮어주옵소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이 바로 이 덮음의 기도입니다. 

덮음을 받은 자가 드리는 덮음의 기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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