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1. 주일
요한복음 1:1-18
- 태초에 계신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리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니라.
- 빛을 증언하는 요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 참 빛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게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 육신이 되신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시작과 많이 닮았다.
물론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작이 다르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는 창세기의 시작을 따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요한복음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근원부터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우리 믿음의 근본이 흔들린다.
내가 누구를 믿느냐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표현하며 시작하는 것일까?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되는지 고민하였을 것이다.
창조의 모든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그 말씀의 존재 시작, 그리고 하신 창조 사역,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이 빛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커다란 그림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 그 죽음을 극복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막연한 소망이 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생명의 근원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생명 안에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생명의 근원되신, 참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오직 이것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요한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빛이 우리에게 비추었다. 아니 직접 우리에게 오셨다.
무지한 인간들은 그 빛, 참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빛을 영접하는 자만이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런 사실이 믿어지는 것은 자의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이 사실을 사람들이 믿도록 돕기 위하여 세례요한이 먼저 와서 증언하였다.
은혜 위의 은혜, 율법 위에 은혜와 진리, 모세 위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참 빛,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라고 요한은 힘주어 강조한다.
믿음이 흔들릴 때, 내가 누구를 믿는지 점검해야 한다.
요한 사도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영지주의에 믿음이 흔들리는 신자들을 향해
믿어야 할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참 빛, 생명, 말씀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하나님이시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주님
2월 첫 날 새벽을 깨워 주시고 말씀을 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보여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죽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죄인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그 참 빛 안에 거하게 해 주셔서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평생에 이 빛에 거하고, 말씀이신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신실한 믿음의 순례길 잘 걸어가게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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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의 말씀, 생명, 빛 ]
말씀과 생명과 빛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요한복음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태초'가 지극히 인간적인 '육신'으로 연결됩니다.
(1-5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태초에'(창 1:1)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서로를 향해 친밀하게 마주하며 연합하셨던 창조의 주체이십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바로 그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말씀과 뜻 그 자체이자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십니다.
그 태초의 예수님이
어둠에 사로잡힌 이 세상을 새로이 창조하시려고 생명과 빛으로 오셨습니다.
나를 지으신 말씀이 나를 살리시도록,
안락한 어둠의 자리에서 빠져나와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에게 삶을 의탁합시다.
(6-8절)
어둠이 빛을 거절할 것을 내다보시고,
먼저 세례(침례) 요한을 보내어 세상을 설득하셨습니다.
내가 빛으로 나오기까지 요한의 역할을 한 수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내가 요한이 되어 그 빛을 증언해야 할 차례입니다.
(9-13절)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유대인은 혈통을 앞세우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처했지만(8:41),
예수님을 배척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존재)을 믿음으로 삶에 받아 들이고 일상에 개입시킨 이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고 출생합니다.
믿음은 관계적 용어입니다.
심정적 동의가 아닌, 신뢰와 의지와 순종입니다.
비유하자면 '의자가 튼튼하구나'하고 인정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의자에 털썩 앉는 일입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삶 전체, 인격 전체를 내어드리는 이가 빛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4-18절)
광야에서 하나님은 성막과 율법을 통해 백성 가운데 거하셨지만,
이제 '육신이 된 말씀'이자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 백성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출 33:20-23),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구약 시대도 은혜의 때였지만 우리에게는 '은혜 위에 은혜'의 하루가 주어져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고,
육신으로 오셔서 말씀을 체현하신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백성이 되고 주님이 왕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저를 다스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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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1(주일)
요한복음 1:1-18 은혜 위에 은혜
찬송가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사면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심으로써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시는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한통속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는 죄를 이기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한통속이 된 자가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빛이십니다.
말씀으로 빛을 밝히십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그 안에 거하시는 자는 어둠에 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을 증거하는 선지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빛 자체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에게 이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문제는 빛이 비쳐도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1:5).
정확히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이 빛을 거부합니다.
빛이 비치는데, 환한 생명의 길을 비춰주시면서 그리로 나오라고 하는데,
다 준비되어 있는데, 그리로 가지 않습니다.
선글라스 끼고 ㄸ폼 잡고서 밝은 빛을 일부러 거부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 곧 죄가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가 단것을 계속 먹으면서 그것이 맛있는 거라고 착각합니다.
길든 입맛이 그렇게 우리를 속입니다.
사실은 내 몸이 맛있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있는 유해균이 맛있다는 신호를 뇌에 보내어
우리를 속이는 것인데 뻔히 알면서도 속습니다.
이처럼 죄가 우리 안에서 고집을 부립니다.
어둠이 좋다고 계속 우깁니다.
우리가 속아서 따라갑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의 감정이 속아 넘어갑니다.
진짜 좋은 줄 압니다.
유해균이 우리 몸 안에 있어서 우리 몸의 일부처럼 여겨지듯이
죄도 우리 안에 오래 자리 잡고 있어서
그것이 우리의 본연의 모습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죄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우리 본연의 순수한 감정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 똥고집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어둠이 생명의 빛을 붙들게 만들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어둠이 빛의 말씀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해답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독생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분 안에 ‘은혜’가 가득합니다.
그분이 은혜를 가지고 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11-13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곧 그 이름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에게입니다.
이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복과 권세와 생명을 누리는데,
문제가 뭐라는 말씀입니까?
결코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지각과 노력(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는 영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요 진리이십니다. 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한통속이 되면 무조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어둠에 물든 인간들이
진리의 말씀,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로 우리 가운데 오셨을 뿐만 아니라
충만한 은혜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어둠에 속하여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마침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해 주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16).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황송한 은혜인데,
그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을 어르고 달래어
마침내 진리를 받아들이게 만들어 주시는 은혜까지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있습니다.
스스로는 어둠을 깨치고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어둠인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직접 찾아오셔서 설득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놓으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이 예수님의 목숨을 다한 설득에 힘입어,
우리는 죄를 깨닫고 죄인임을 자백하며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는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형벌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은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고 무한한 용서 가운데
믿음의 길을 닦아 나가는 특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은 한 번 믿고 끝나는 행위가 아닙니다.
12절에 ‘영접하는’은 한 번 영접함으로써 끝나는 사건을 표현한 동사입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가 믿음을 한 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일로 오해하게 될까 봐,
성령님께서는 다시 부연 설명해 주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으로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믿는’의 동사 형태는 현재분사입니다.
이는 계속되는 동작, 진행 중인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 형태입니다.
‘믿는다, 맡긴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피스튜오’의 어원은
‘피스티스’라는 명사입니다.
이는 ‘충성, 성실, 설득됨’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21절의 ‘착하고 충성된 종’에서
‘충성된’은 ‘피스토스’로서 ‘설득이 잘 되어 충성된’의 뜻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설득된 자가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충성된 태도를 말합니다.
이 동사를 진행의 뜻을 가진 분사형으로 사용한 것은
‘믿음’이 단회적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동작이 아니라,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설득하시는 은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진리이신 예수님께 충성스럽게 살아가도록 설득하십니다.
평생 설득하십니다. 영원히 설득하십니다. 기어코 설득하십니다.
설득하고 설득하셔서 우리를 기어코 진리에 이르게 하시는 것,
성육신을 통해서, 임마누엘 성령님을 통해서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충성된 은혜, 헤세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17절과 18절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율법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냥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뒤는 “니가 알아서 해라.” 이것이 율법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죄를 지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는 설득될 때까지 죄를 지적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진리는
결코 “니가 알아서 해라.”로 끝내지 않습니다.
알아들을 때까지, 진리에 굴복할 때까지 계속 설득하시는 은혜가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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