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와서 보라 !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2. 3. 07:05

2025.2.3. 화요일

요한복음 1:35-51

 

- 예수님을 따르는 요한의 두 제자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 시몬을 게바(베드로)라 부르심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만남과 초대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세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에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 만남과 고백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하므로 믿느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오늘 본문에 '보라', '와서 보라'는 단어가 여러 번 사용된다.

세례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 할 때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한다.

예수님이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라고 하셨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는데 믿지 않자 와서 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나다나엘(가나 출신, 9c, 바돌로매로 인정)에게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신다.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고, 누구를 바라보는냐가 중요하다.

인간은 보고 들음으로 알게 되고 믿게 된다.

아직도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도 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이 봄으로 인지되고,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믿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핵심은 누구를 보느냐,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와서 보라 !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신을 먼저 보았다하므로 믿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엄청난 은혜의 말이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의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 주시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우리 인생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주시면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 구원과 은혜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요한의 두 제자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신다.

인생의 길을 찾는 자에게 정곡을 찔러 물으신다.

너희가 진정 원하고 바라고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어디에 거하시냐는 질문은 단순한 거처를 묻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함께 교제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요청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무엇을 구하고 찾으며 인생길을 걷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주님

이 미천한 것을 보시고 안다고 말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과 더 친밀한 교제 가운데 나아가게 도와주소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허락하시는 주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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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서 보아라 ]

 

세례 요한의 증언에 안드레가 따르고 안드레의 증언에 베드로가 따릅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부르시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인도합니다.

 

(35-39절)

'이튿날'(29,35,43절)은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를 떠올리게 합니다.

태초에 하루하루 피조물을 창조하셨던 '말씀'께서,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루하루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을 창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며 하루를 그들과 거하시는데,

'거하다'라는 단어는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꼭 붙어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15:4-7).

주께서 말씀 안으로 내가 초대하시어 나와 거하기 원하실 때,

그 초청에 즐거이 응하여 새로이 창조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40- 50절)

시몬의 이름을 이미 아셨고,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을 기다리셨습니다.

시몬을 '반석'(아람어로 '게바, 헬라어 '베드로')으로 바꿀 만남을, 

나다네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더 큰 일을 볼 자'로 칭찬할 만남을 고대하셨습니다.

안드레는 시몬에게 그가 왜 메시아인지 납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메시야를 만났다"고 할 뿐입니다.

빌립은 보잘것없는 예수님의 출신지에 실망하는 나다나엘에게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와서 보라"고 할 분입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주와의 만남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납득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이 만남을 갖기 원하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들려주길 바라십니다.

 

(43절)

만남의 주도권을 쥐고 계십니다.

빌립을 주도적으로 만나시고 "나를 따르라"고 제자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하셨습니다.

내가 찾은 것 같지만 주님이 나를 먼저 찾으셨고,

내가 영접한 것 같지만 주님이 나를 제자로 영접하셨습니다.

내가 따른 것 같지만, 그분이 붙잡고 인도해 오신 길이었습니다.

 

(51절)

야곱은 사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지만(창 28:12),

예수님은 친히 사다리가 되어 하늘과 땅을 잇는 중보자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동안,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우리 사정을 하나님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와 보라" 부르신 주님, 저도 "와 보라"고 주께 인도하는 증인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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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9-42절

[  예수님을 보여주는 전도 ]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전도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자기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전도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안드레와 요한이었을 것으로 추측)에게 전도합니다. 

“와서 보라!”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에게 전도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전도는 예수님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니, 보라고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만났으니 예수님 보러 가자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특별한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 보고 만나게 해 주는 것으로 전도가 되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예, 됩니다.”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는 것으로 전도는 완성입니다.

주님이 제자를 불러서 가장 우선적으로 하신 것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14-15]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 이것입니다. 

자기를 경험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자신을 알게(야다)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외적 방편인 말씀, 기도, 성찬이 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말씀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인데(출 29:42, 43), 이 성전의 다른 이름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만지며 먹고 마시는 경험을 하는 예식입니다. 

말씀, 기도,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은혜요, 구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나님 알게 해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하나님 닮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부부가 닮듯이 오래 함께 지내면 닮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닮습니다.

예수님 닮아보려고 달리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닮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 계속 가지면 됩니다. 이거면 됩니다!

안 되는 것 같아도, 어느 날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전도의 목적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예수님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자신을 맡겨 드린 자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노예처럼 복종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사귀는 가운데,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가운데,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동원되고 다양한 방식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예수님을 보여 주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세례조차도(물 세례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세례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31절).

예수님을 보여줄 수 없다면,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지 못한다면, 

전도를 하고 세례를 주는 일이 무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전도가 무의미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주 조심하였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주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고 교회가 드러나면,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목사를 자랑하게 되면, 

그 전도는 실패한 전도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고 자신이 완전히 무시를 받은 것 같아도 

혹시 나의 전도를 통해 상대방이 예수님을 느꼈다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면, 

그 전도는 성공한 전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훌륭한 전도자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 보세요. 와서 보세요."라고 전도할 수 있는 교회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니, 와서 보라고 전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 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분명히 회복된 교회가 되면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처럼, 안드레처럼 그렇게 전도할 수 있겠지요. 

그런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녀들에게 “자 봐라. 와서 봐라!”라고 전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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