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14. 토요일
요한복음 12:34-43
- 빛이 있을 동안 믿으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면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 숨으시니라.
-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유대인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 불신의 원인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이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유대인이 아는 메시아는 율법에 영원히 있다고 하였는데
너는 죽는다고 하니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땅에 잠시 동안 있다가 가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빛이 잠시 세상에 있을 터이니 그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고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고 하신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믿을 만한 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다고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예수님을 믿었으나 당장 눈앞의 안위에 그 믿음을 숨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들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라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표적들을 보여주셨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님을 요한 사도는 지적한다.
주님
주님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으로 가신 것도 믿습니다.
빛에 거하여 어둠에 다니지 않겠습니다.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나의 어떠함을 위하여 살거나, 믿는 것을 숨기며 살지 않게 하시고
빛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용기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소서.
성령님, 빛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어둠에 갇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자랑스럽게 살아가게 인도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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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이 있을 동안에 ]
예수님은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또 어떤 이는 믿으면서도 그 믿음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35-36절)
"아직 잠시 동안 빛이 있을 때에 믿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여기서 '빛'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며,
'잠시 동안'은 구원의 기회가 영원하지 않음을 경고합니다.
빛이 사라지면 영적 무지와 심판의 어둠이 덮칩니다.
우리는 종종 내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재단하며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은혜받을 기회는 우리를 마냥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빛 되신 주님이 함께 계실 때,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즉시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빛 가운데로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34절)
무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시 110:4, 단 7:13)는 알았지만,
'고난받는 종으로 오실 그리스도'(사 53장)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십자가에 들려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아는 지식과 주님을 아는 지식은 별개가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서 옵니다.
(37-41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표적도 믿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불신의 모습에 요한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습니까?"하며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악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불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악한 그들을 그 더러움과 악함 가운데 내버려두셨을 뿐입니다.
믿지 않은 것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큰 영적 위기입니다.
날마다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성령께 구해야 합니다.
(42-43절)
관원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았지만,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믿음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드러냄으로 입을 불이익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람이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합니다.
세상에 그 믿음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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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을 비추기 전에 먼저 어둡게 하시는 하나님 ]
찬송가 499장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35절)의 문자적인 번역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을 소유한 것에 걸맞게 지속적으로 행하여(생활하여)
어둠이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입니다.
36절은 35절을 다시 되풀이하여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36절의 '믿으라'에는 진행과 계속의 뜻을 가진 동사형이 사용되었습니다.
단순히 사실이나 능력을 믿는 태도 촉구가 아닌
신뢰하며 붙어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believe in'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몸을 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믿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42절).
그들이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43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 믿지 않습니다(38절).
표적을 보고 기적을 경험하고도 잘 믿지 않습니다(37절).
일부가 믿음을 고백하지만(42절) 그 믿음이 지속되지는 못합니다(39절).
39절의 ‘능히 믿지 못한’은 ‘계속 믿지는 못한’의 뜻입니다.
미완료와 현재형의 동사가 같이 사용되어 계속되는 상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42절의 ‘믿는’은
지속적이지 않은 일시적인 믿음, 한 번 믿어보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적절한 번역은 ‘믿기 시작한’ 정도일 것입니다.
[* 42절의 ‘믿는’은 헬라어 ‘아오리스트’ 동사입니다.
아오리스트는 일반적으로 ‘부정과거형’이라 부르는데
실제는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점동작(한 번으로 그 행위를 끝내버리는 동작) 또는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동사형입니다.
헬라어 동사에는 사실상 시제 구분은 없습니다.
동작의 형태, 동작의 상태를 구분하는 동사 변화를 가지는 것이 헬라어 동사의 특이한 점입니다.]
또한 42절의 '그러나'는 앞 문장과 연결되는 접속사가 아니고 뒤 내용과 연결되어
'~임에도 불구하고'의 뜻을 가지는 접속사 '호모스'의 번역어입니다.
백성들과 달리 관리들 중에는 믿은 자가 있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문장이 아닙니다.
관리 중에도 ‘한번 믿어봐?’ 하는 생각을 한 자가 많았으나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여 지속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일반 백성이 지속적인 믿음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관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십자가의 영광, 아가페 사랑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권세와 부의 영광, 자기애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한번 믿어보는 것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 참된 믿음은 지속적인 믿음입니다.
빛에 붙잡혀 있는 믿음, 빛에 계속 머물러 있는 믿음(35, 36절)입니다.
십자가를 영광으로 받아들여 계속 붙들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위한 대책을 이미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 대책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요한 사도는 그것이 이미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38절).
하나님의 구원 계획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주신 40절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40절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사야 6:9-10절 말씀으로 가서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1장부터 죽 이어져 온, 하나님의 심판 선언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최종 멸망의 심판이 아니고,
결국은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적인 심판입니다.
이사야 1장 15절에서 동일한 뜻의 말씀을 이렇게 주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그리고 바로 이어서 1장 2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패역한 백성들의 눈을 가리시는 이유는,
그들이 거짓된 회개에 만족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1:15절에서는 백성들의 눈을 가린다고 하시지 않고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린다’고 하셨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되 지속적으로 경험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하십니다(계3:15).
미지근해서는,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자기의 죄악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지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래서 죽어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빛을 일시적으로 거두어버리십니다.
그들을 어둠에 다니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믿음의 열정이 다시 타오르게 하기 위해 냉각기를 가지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외식으로만 그런 척하는 상태에 있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자신이 어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악한 죄인임이 분명한 자가 차라리 회개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빛을 일시적으로 가리시고 어둠을 더 짙게 만드십니다.
언제까지요? 황폐하기까지, 거룩한 그루터기만 남을 때까지입니다.
[사 6:11-13]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새벽 해뜨기 직전의 어둠이 가장 짙은 것처럼,
이 캄캄한 어둠을 뚫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칠 것을 기대하시며 그렇게 하십니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서 빛이 비칠 때에 그 빛은 더욱 밝을 것입니다.
그래서 빛을 비추기 전에 먼저 어둡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곧 십자가의 영광을 깨달았기에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41절, 사 6:10).
율법을 주신 목적도 이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직접적인 목적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자신의 죄가 너무나 지독하여 죽음(=십자가) 외에는 해결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야
비로소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죄인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죄인을 교화시켜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죽여서 위로부터 태어나는 새사람으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주님, 어둠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소경인 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어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십자가의 영광으로 우리의 죄를 밝히 드러내시옵소서.
그 영광 앞에 완전히 거꾸러져서
주 예수님을 영원히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을 확실히 붙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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