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11. 수요일
요한복음 12: 1-11
- 향유를 부은 마리아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에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가롯 유다의 비난
제자 중 하나로써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예수님의 옹호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나사로 살해 음모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내실 마지막 유월절의 6일 전에 베다니에서 생긴 일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집에서 잔치를 열었고 예수님도 초대 되었다.
마리아가 예수를 위해 나드 향기 나는 삼백 데나리온의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먼지 묻은 발을 씻는다.
이에 가롯 유다는 왜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고 책망하자
예수님은 이는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변호하신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도울 수 있다고 하신다.
자신의 장례는 한 번 뿐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향유에서 죽음으로 시선을 바꾸신다.
요한은 가롯 유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한 마디 덧붙혀 기록해 두었다.
그는 도둑이라. 돈 궤에서 훔쳐갈 생각으로 말한 것이라고 ....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보러 오지만
오히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더 보고 싶었을 것이다.
호기심과 신기함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찾아와서
죽었다가 살아난 실제 인물인 나사로를 보고 이를 살려내신 예수를 믿는다.
죽음에서 부활한 실체, 나사로를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도록 확실한 표적을 보여 주셨다.
더 이상 사람의 부활이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못을 박으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그러자 이 겁잡을 수 없는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낀
종교 지도자들은 혼란에 빠지고 예수와 더불어 나사로마저 죽이기로 모의한다.
마리아는 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으려고 생각했을까?
어떤 의미로, 무슨 생각을 하고 그 비싼 향유를 발에 부었을까?
정말 예수님의 죽음을 예측한 것일까?
이 사건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읽혀지고 기억될 일이다.
오라버니의 생명을 다시 살려내신 것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으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전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작은 것이라 생각하며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주께 드렸다.
죽으실 예수를 위하여, 부활할 예수를 향하여,
예수가 진정 부할과 생명이심을 고백하며 부어 드리는 전제였을까?
단순한 감사 이상의 무엇이었을까?
눈으로 보고 만져 보아야 믿는 우리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에 퍼져갔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를 보기 위해 찾아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다.
결국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사로는 복음의 산 증인이 되었다.
종교지도자들은 두려웠다.
나사로를 없애는 것이 이 상황을 진정시키고 해결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문제의 본질을 보기 보다 나의 유불리를 먼저 따지고 행동하는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을 읽는다.
주님
마리아의 믿음을 닮기 원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나의 모든 것을 드려 감사를 표할 줄 아는 자 되기 원합니다.
나 또한 죽었다가 살아난 자임을 기억하며
나사로처럼 복음의 산 증인으로 살기 원합니다.
성령님 나에게 이 부활한 영생을 소유한 자로 늘 감사하며 살도록 인도해 주소서.
부활 신앙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겠습니다.
이 믿음 단단히 붙잡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 가도록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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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유 냄세와 돈 냄새 ]
에수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쏟아부은 마리아의 순수한 헌신과
이를 경제적 손실로 계산하며 비판하는 가롯 유다의 위선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 7-9절)
마리아의 행위를 다가올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예언적 행위로 해석해 주셔서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변호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도와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특별한 시간이라고 덧붙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 이면에 담긴 동기를 정확히 꿰뚫어 보십니다
사람들은 비난해도 주님은 "네가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하였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세상의 평판보다 중요한 것은 내 헌신에 대한 주님의 해석과 인정입니다.
(1-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당시 여인이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나,
마리아는 자신의 영광인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가장 낮은 곳인 발을 닦았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체면이나 재물 따위는 조금도 아끼지 않는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는
예수님을 향한 예베와 삶에서 드러납니다.
(4-6절)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며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그의 말은 표면적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헌금함에서 돈을 훔치려는 탐욕이 빚어낸 위선이었습니다.
믿음의 언어 뒤에 숨은 우리의 욕심과 계산이 없는지 정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9-11절)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뿐 아니라 나사로를 보려고 몰려옵니다.
나사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예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였기에,
많은 이가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한편 이 상황을 알게된 대제사장들은 예수님뿐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증언하는 존재로 살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우리를 거부하며 배척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내 삶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 합니까?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 때문에 나사로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마리아처럼 가장 귀한 것으로 사랑을 고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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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의 영광, 죽음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영광 ]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사건 이후로,
예수님의 복음 증거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게 된 사건이
국면 전환에 더 박차를 가하게 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마리아를 질책합니다.
이런 가룟 유다를 예수님이 질책하십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면, 가룟 유다의 질책이 타당합니다.
예수님은 명품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삼백 데나리온 어치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 1일 품삯이니, 300일치 품삯, 즉 노동자 1년 연봉입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비싼 향유로 발을 씻으며 좋아하는(?) 예수님, 이상한 예수님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이 예수님의 장례와 연관된 것이기에 다르게 반응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가 마땅히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십니다.
의외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식이 화려하게 치러지기를 원하신 것일까요?
사는 동안에 그만큼 고생했으니 죽을 때만큼은 호강을 누려야겠다는 말씀이실까요?
그래서 무덤도 부자의 무덤을 차지하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화려한 모습으로 자신을 과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향유를 발에 부은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사건을 일으켜(?),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 준 것이 기특하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12장에는 예수님의 옆에 붙은 조연으로 나사로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나사로에 대한 언급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1절, 9절, 17절).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언급하면서
요한은 어김없이 그 앞에 ‘죽은 자 가운데서’를 덧붙입니다.
나사로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이
죽은 자 가운데서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 사도가, 이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의’ 영광을
중요하게 여기며 강조하는 이유를 눈치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대신한, 우리를 대표한 죽음과 부활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사실상 우리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예수님은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영광은,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영광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과 영광을 동일시하기까지 하십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면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영광인 것은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옛 사람이 죽는 것이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다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죽는 자에게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입니다.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지고 애쓰고 힘써야 하는 것은 죽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전제가 우리의 죽음입니다.
죽음으로 표상되는 믿음입니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사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정말 믿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일입니다.
이 믿음의 일이 우리의 구원에 너무도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온갖 표적을 통해, 여러 상황을 통해, 수많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 곧 우리의 죽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곧 우리의 십자가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려고 애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도 감수하시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성을 부여하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믿고,
우리도 죽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도 기꺼이 죽는 자리로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부활의 영광이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죽음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죽음을 영광스러워하십니다.
주님,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복음이라는 바울 사도의 증언(고전 1:17)을 되새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몸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생명의 길, 그 십자가 복음을 붙들겠습니다.
죽을 수 있는 믿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믿음,
이 영광의 믿음을 굳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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