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8 주일
요한복음 11;28-37
- 예수님을 마중하러 가는 마리아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 마리아의 엎드림과 슬픔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예수님의 비통함과 눈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게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엇갈린 반응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히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
주님을 만나도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잊어 버리고
자신의 현재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에만 생각이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 사람이다.
예수님의 머리에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붓던 그녀가 아니던가?
우리의 생각과 믿음은 따로 노는 것 같을 때가 많다.
모든 일이 다 주의 권세 아래 있고 주관자이심을 잊어 버린다.
부분적, 특별한 일에만 주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을 다 주님께 맡겨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단지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울자 감정적으로 슬퍼하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주관자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아직도 사망 권세에 굴복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불쌍하고 안타까워 하심인가?
그렇다. 부활과 생명의 주관자를 앞에 모시고도 사망의 권세 아래 두려워 떨고 슬퍼하는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믿음 없음과 한계를 바라보시고 격분하시는 눈물이었다.
이에 보인 유대인들의 말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나사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우셨고,
맹인은 고쳐도 죽음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능력의 한계를 비아냥 하는 말이다.
주님
창조주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주 되심을 고백합니다.
삶의 모든 것이 주님의 뜻 안에,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며 살아가겠습니다.
성령이여 나의 부족한 믿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매사에 주님을 주로 인정하고 의지하고 살게 도와주소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내 안에 주님이 주신 생명이 있음을 굳게 믿고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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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
마리와 함게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신 예수님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고
죽음을 향해 분노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28-30절)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애곡하는 무리가 있는 곳에서 마리아를 불러내십니다.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신 것은
죽음을 끝낼 존재로서 죽음의 지배를 받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고,
마리아를 불러내신 것은
그 세계에서 나와 생명의 주께로 오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과 사랑의 나라로 부르시는데
아직 죄와 죽음의 왕 노릇 하는세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마리아처럼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31-35절)
마리아도, 그를 위로하러 온 유대인들도 모두 울고 있을 때,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하시며 무덤을 찾으십니다.
모두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와서 보옵소서' 하는 체념의 초대를 받아 무덤으로 나아가십니다.
생명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억류하고 있는 사망의 진지로 돌격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관망하지 않으십니다.
썩어 냄새나는 절망의 현장, 가장 비참한 죽음의 자리까지 찾아 오십니다.
주님이 내 아픔에 당도하시는 순간, 그곳은 무덤이 아니라 생명의 산실이 됩니다.
(33, 35절)
마리아와 조문객들이 우는 것을 보시더니
"비통히 여기시고"(격분하시고) 끝내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하는 이의 아픔에 대한 완전한 공감이자,
인간을 짓누르는 죄와 죽음에 대한 거룩한 분노이며,
죽음의 세력을 멸하려는 각오입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이토록 격한 감정을 느끼신 까닭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겪는 절망에 함게 슬퍼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 절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36-37절)
예수님의 행보를 보며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립니다.
예수님의 눈물에서 사랑을 읽어 내고 예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사람과
'눈 먼 사람도 고쳤다면서, 자기 친구는 왜 죽게 뒀느냐?" 하며 비난하고 의심하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같은 경험을 하고도 전혀 다른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보는 우리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주님의 눈물에 담긴 사랑과 능력을 믿고 주께로 나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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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개하시는 예수님 ]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우는 것, 함께 한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고 비통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예수님께 전염이 된 것일까요?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고,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릴 정도로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마리아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도 격정을 이기지 못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통과 눈물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제자들로 하여금 참 믿음에 이르게 할 것을 기대하시며 기뻐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나사로의 위급함을 듣고도 일부러(?) 늑장을 부려서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 도착하셨습니다.
도착하셔서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그것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던 예수님께서 이제 와서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신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비통해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나사로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대로
나사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죽음은 수면 상태와 다를바 없습니다.
그러니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으로 예수님이 슬퍼하실 수가 없습니다.
죽지도 않은 나사로를 죽었다고 하며
울고불고하는 인간들 때문에 예수님은 슬프신 것입니다.
‘비통히 여기다’의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분개하다, 억울해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개역한글성경은 ‘통분히 여기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음의 세력’을 향하여 분노하시며,
죽음의 세력에 마음이 짓눌려 있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고 계십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그들 곁에 있음에도
죽음 때문에 절망하는 모습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항상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 두려움과 절망은 오히려 복이 됩니다.
그러나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예수님을 비분강개하게 만듭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죽기 전이라면 예수님이 뭔가를 하실 수 있었겠지만,
이제 죽어버렸으니 예수님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예수님보다 더 커 보이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런 류의 절망과 공포는 사람을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인생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고 유한한 생명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냅니다.
욕심과 탐욕을 자극합니다.
'죽으면 끝이니 살아 있을 동안에 최대한 즐겨야 해.'
이러면서 오직 즐기는 것에 탐닉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의 공포와 슬픔으로부터 해방하시기 위해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육신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한 일정한 권한을 할당 받은 사탄의 권세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보여주시려고 혈과 육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히 2:14-15] 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복음서에 기록된 표적을 세분류하여 구분하면,
예수님이 가장 많이 행하신 표적은 죽은 자를 살리는 표적입니다.
맹인을 고치신 것, 문둥병자를 낫게 하신 것,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 음식에 축사하여 많은 사람을 먹이신 것 등
여러 종류의 표적이 2~3개씩 기록되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 표적은 스스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을 포함하여 4개나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
나인이라는 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눅7장),
나사로를 살리신 것,
그리고 예수님의 최종적인 표적인 예수님 자신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의 문제(=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구원주이십니다.
주님,
우리를 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건져주시기 위해,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지요?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 육체의 죽음은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그렇게 여러 번 죽은 자를 살리셨지요?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믿는 나에게 생명이 임했음을,
주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임했음을 확신하며
더 이상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에 이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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