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 6 금요일
요한복음 11;1-16
- 나사로의 발병과 누이들의 전갈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영광을 위한 병, 사랑에서 비롯된 지체
예수께서 들으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되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다시 유대로 가려는 결단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 죽음 선포와 믿음을 위한 부재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으로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 도마의 비장한 결단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게 죽으로 가자 하니라.
...................................
인간의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그 사망의 권세를 깨드릴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이 진가를보여 주신다.
사람이 죽어서 3일이 지나면 확실히 죽었다고 믿던 시대여서 주님으 이틀을 더 기다리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그들이 따르는 주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게 하려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자신이 영광을 받으리라 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표적 중에서 가장 확실한 표적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메시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말이다.
주님
나사로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이 표적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있는 남아 있는 의심이 있다면 모든 의심이 다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주관자 되신 주님,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주님이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믿으며 나의 모든 것을 주님게 의탁합니다.
성령님 나에게 확실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신뢰하며 살게 인도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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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을 기다림 ]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에 걸려 위중했지만,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를 기다리십니다.
(1-4절)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 일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이요 생명'(25절)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아픔과 슬픔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대단원을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5-6절)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는데 당장 달려가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예수님의 지체하심은 무관심이 아니라 의도된 지연입니다.
병을 고치는 수준을 넘어,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주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지체하심에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기대를 뛰어넘는 은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7-10절)
제자들이 베다니가 속해 있는 유대로 다시 가기를 두려워하자,
낮과 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낮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
밤은 예수님을 떠난 불신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함께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 낮이고,
주님 없이 다니면 실족을 피할 수 없는 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올바른 일을 추구하며 실족하지 않도록 빛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 주님이 "가자" 하시는 길로 가는 삶은 언제나 낮입니다.
설령 돌이 날아들더라도 빛입니다.
(11-16절)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시고 "내가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생명의 주관자임을 제자들에게 알리십니다.
"너희 믿음을 위해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한다"는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을 부활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로 사용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아직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들은
인간적인 의리로 "주와 함게 죽으로 가자" 하지만,
나중엔 부활의 소망을 품고 죽는 데까지 주님을 따라갈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침묵 속에서도 영광을 나타내실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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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
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웨스터민스터 대.소 교리문답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제1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가 4절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15절에서 예수님이 확인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이 ‘사랑하시더니’(5절)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예수님께 중요한 사람이었던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의 일관된 관심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감정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고(히4:15);
마리아, 마르다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심령에 비통히 여기고 불쌍히 여겼던 분이십니다(11:3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중병에 걸린 것을 오히려 좋은 기회로 여기십니다.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하시면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일부러(?) 지체하십니다.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계시던 곳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틀을 더 유하셨다가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7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결코 어둠에 있지 아니하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9-11절).
사랑하는 자들이 이것을 확실히 믿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믿음, 하나님을 기쁘시게(영광스럽게) 하는 믿음을
그들이 갖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곳에 있지 아니한 것이 더 잘된 일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셨더라면,
마르다의 성화(?)에 못 이겨(21절)
나사로가 죽기 전에 병을 고쳐 주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사로 남매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3절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는 ‘필레오’입니다.
감성적이며 애틋한 사랑을 말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애틋한 마음으로 즉시 달려오시기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히려 이틀을 더 지체하신 후에 느긋하게(?) 길을 나서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5절에서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5절에 사용된 단어는 ‘아가파오’입니다.
특별히 ‘아가파오’를 문장 제일 첫머리에 내세워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죽지 않고 병에서 나음을 얻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인데,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감성적으로는 얼른 달려가서 그 아픔을 없애주고 병을 고쳐주고 싶습니다.
그런 사랑이 열등한 사랑이거나 잘못된 사랑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그것에 그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더 큰 유익과 기쁨을 위해 당장의 유익과 기쁨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당장 병 고침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사로 본인뿐만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관심은 과연 예수님과 같은 것인지,
나의 관심은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가
장 귀한 가치인 ‘믿음’에 집중되어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시는 것을
나도 똑같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이 아니라 단순히 평안과 명예와 건강에
나의 관심이 더 집중되어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주님, 지금 나의 관심이 주님의 관심과 온전히 일치하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러하지 못하였고 마르다도 오빠의 건강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었지만,
결국 예수님의 일관된 섬김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소망을 가집니다.
부와 명예와 건강에 변동이 없더라도,
심지어 그것에 손해가 있다 하더라도,
믿음이 커지는 일에 나의 관심이 쏠려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권면하여
나의 관심이 주님의 관심과 온전히 일치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나의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나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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