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영적 눈 먼 자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3. 3. 07:05

2026.3.3. 화요일

요한복음 9:24-41

 

- 알지 못하는 것과 아는 것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 반복된 질문과 치유받은 자의 반문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 모세의 제자를 자처하는 바리새인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 논리적인 반박과 부당한 출교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되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 예수님과의 만남과 신앙고백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 보게될 자와 못 보게 될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게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맹인의 신앙고백이 놀랍고 아름답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눈을 뜨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다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다.

 

반면에 어떤 트집이라도 잡고자 혈안이 된 바리새인들의 눈은 눈 뜬 장님이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영적 장님이었다.

나는 어떠한가?

육신의 눈은 뜨고 있어도 내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영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 오셨다고 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 심판하러 오셨다고 말씀 하신다.  

 

주님

무지하고 몽매한 저의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소서.

저의 영안의 눈을 열어 주셔서 주님을 바로 보고 믿게 하소서

성령이여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셔서

매사에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시고 분별할 수 있도록 은혜를 입혀 주소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깨닫고 분별하고 결정하며 살게 하소서.

눈 뜬 장님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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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게 된 자와 스스로 눈먼 자 ]

 

앞을 못 보던 사람이 점점 더 분명하게 믿음을 고백하게 되는 과정과

스스로 본다고 자부하던 영적 눈멂 속에 머무는 바리새인들이 대조되며,

'참된 봄'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35- 38절)

눈 뚠 사람이 출교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친히 그를 찾아 오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질문하심으로 그의 영적인 눈을 완전히 열어 주십니다.

눈 뜬 사람은 예수님을 처음에는 '선지자'(17절)로 알았으나,

이제는 경배의 대상인 '주님'으로 고백하며 진정한 영적 시력을 회복합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위해 고난받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육체적 결핍을 채우시는 것을 넘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우리를 이끄십니다.

고난 중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을 때,

주님은 이미 우리를 찾고 계시며 더 깊은 만남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39-41젉)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는 심판'임을 선언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보고 눈이 멀었다고 하느냐?"며 반발하자,

주님은 "차라리 앞을 보지 못한다고 인정했다면 죄가 없겠지만,

본다고 주장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앞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죄 자체가 아니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영적 교만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구원자로, 교만한 자에게는 심판자로 임하십니다.

 

(24-34절)

바리새인들은 시력을 되찾은 사람에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인정하라고 강요하지만,

그는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앞을 보지 못하다가 지금 보는 것이다"라며 체험적 진실을 고수합니다.

급기야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 앞에서

'예수가 죄인이라면 하나님이 그를 통해 내 시력을 회복시키실 리 없다'며

그들의 오류를 반박하다가 결국 출교를 당하고 맙니다.

세상은 때로 교묘한 논리와 권위로 우리의 신앙을 위협합니다.

가장 강력한 변증은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을 이렇게 바꾸셨다"는 선명한 간증입니다.

눈 뜬 사람은 진리를 말한 대가로 공동체에서 쫓겨났지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 라는 말에서  알수 있듯이

그는 이미 제자의 삶으로 들어섰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소외 될지라도 진리 편에 서는 것, 그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눈을 열어 주시고, 주님이 행하신 일을 두려움 없이 고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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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뜬 자의 믿음을 확정하고 강화시켜 주시는 예수님 ]
찬송가 535장 주 예수 대문 밖에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신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바리새인들은 확실하게 적대감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맹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맹인의 비참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일에 아무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맹인의 부모들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합니다. 

아마 우리 중 다수가 여기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될 손익계산이 좀 복잡한 사람들입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식의 눈을 띄워준 분이라면 

목숨 걸고 지지하며 따를 것 같은데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당장 아들이 구걸하여 벌어들이던 수입이 줄어들었습니다. 

평생 맹인으로 지냈던 아들이니 눈을 떴다 해도 아무런 경제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앉아서 구걸만 했을 것이니 신체적인 능력도 형편없습니다. 

부모가 오히려 부양을 해야 합니다. 

눈을 뜬 아들이 뭔가를 새로 배우고 싶다 하면 교육비도 지원해야 합니다.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이 더 빈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는 유대 지배계층들에게 밉보이는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들의 눈이 뜨여진 것에 대해 놀라움과 감사함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일에 감동을 받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감동이 현실의 문제를 압도할 만큼 크지는 못하였던 이들은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는 행태를 보입니다.

그러나 맹인 본인은 다릅니다. 

그에게는 어떤 경제적인 이득보다, 어떤 권력의 위세보다, 

평생 보지 못하던 눈을 뜨게 된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일이었습니다. 

맹인으로 지내던 때의 그 어둠의 절망과 비참을 그는 가장 잘 압니다. 

예전에는 오히려 잘 몰랐지만, 눈을 뜨게 된 지금에는 

보지 못하는 비참함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너무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리새인들의 위협 앞에서도 분명하게 태도를 밝힙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만나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믿고자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인자’를 다른 고대 사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자’라는 말의 의미를 

메시아(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고서 한 대답입니다.

죄의 비참함을 모르는 자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복음을 받고도 여전히 양손에 떡을 쥐고 저울질하며 살게 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잠시 비참한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십니다. 

그 죄가 얼마나 더럽고 비참한 것인지를 잘 모르는 나를 위해, 

더러운 침으로 이긴 진흙을 덕지덕지 발라 버리십니다. 

씻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십니다. 

어쩔 수 없이 씻는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눈을 밝게 열어 주십니다. 

눈이 열려서 죄인의 비참함을 확실히 알게 하십니다. 

다시는 죄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단단하여 결코 깨어지지 않는 굳센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쫓겨난 자를 예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그의 믿음을 확정하고 강화시켜 주십니다.

죄를 깨닫게 되고, 죄를 인정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함으로써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회심의 믿음으로 죄 문제 해결이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회심의 믿음으로 용서받고 용납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결정적인 십자가 승리에 편승하여

죄에 대하여 패배할 수 없는 싸움, 죄와의 남은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회심의 믿음을 고백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그의 심령을 거처로 삼아 주시는 은혜를 더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누구나 예외없이 성령님을 보내셔서

항상 함께해 주시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로써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곳곳에 깊이 숨어 있는 죄의 잔당들을 

남김없이 정리하는 전투(점령 전투)에서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물론 항상 승리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완전히 승리합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항상 계시는 성령님이 이 승리의 보증입니다.

믿음은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주 예수님과의 단단한 결속상태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나의 믿음의 신실성을 주님께서 보시고 내 손을 강하게 잡아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결속이 단단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붙잡는 손을 마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손 때문에 예수님과의 연합이 단단해집니다.

이 연합에 있어서 연합의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래야 연합이 견고해집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셔 주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4:18...23]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마태복음 28:20]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와 항상 함께 계셔 주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계속 들려주고 간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 14:23절의 ‘지키리니’는 ‘실천한다. 순종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주시한다’는 뜻입니다.

실천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은 그 결과물일 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겠다고 했을 때,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하7:5 ...11,12] 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11.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우리를 위한 집 곧 성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시는 집입니다. 

성전은 단순히 제사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우리를 성전 만드신 것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거처로 삼으신 것은(요 1:14상), 

항상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요 1:14하, 1:16). 

믿음의 능력은 이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믿겠다고 다짐하며 애써 보지만 

결국 우리의 믿음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히 12:2).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위하여 해야 할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뭔가 이루고, 행하고,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믿음의 선봉에 잘 따르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시선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39절)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내가 본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경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것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눈을 열어 주셨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여전히 소경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를 잘 받는 일에 힘쓰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계속 듣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님을 통해 계속 함께하며 가르쳐 주옵소서. 책망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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