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2. 월요일
요한복음 9:13-23
- 치유받은 자를 추궁하는 바리새인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았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이니이다 하니
- 부모를 추궁하는 바리새인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아다.
그에게 물어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 출교에 대한 두려움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
똑같은 상황을 두고 의견이 나뉜다.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율법적 사고에 갇힌 사람과
표적을 일으키는 것은 죄인이 할 수 없다는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맹인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실을 간략하게 전하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은 선지지라고 당당히 고백한다.
반면에 부모는 출교가 두려워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책임을 회피한다.
주님
진실을 말하여야 할 때 진실을 당당하게 말하는 용기있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협과 협박과 책임의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왜곡하거나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문제와 상황 앞에서 진실을 깨닫는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표적을 일으키신 분이 선지자, 그리스도 메시아이심을 바로 알고 고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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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게 된 자의 고백 ]
안식일의 치유 사건을 두고 바리새인들은 사건을 왜곡하고,
부모는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을 보게 된 자는 사실을 직시하며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13-16절)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 된 기적 앞에서도
오직 '안식일 준수'에만 집착하더니,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한 행위를
안식일의 노동 금지법을 어긴 '죄'로 규정합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생명'은 외면한 채,
종교적 형식(제도)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된 것입니다.
그 시선이 생명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정죄하는 모습을 낳았습니다.
우리 역시 본질보다 형식에 매여 있는 신앙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예수님의 마음보다
내 방식과 전통을 고집한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선한 일을 보는 눈이 어두워질 뿐입니다.
( 17절)
바리새인들이 재차 묻자, 치유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비록 완전한 신앙 고백에 이르지 못했지만,
출교할 권한이 있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담대한 발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가리켜
안식일 규정을 어긴 죄인이라고,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해도,
그의 눈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분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겠습니까?
(18-19절)
유대인들은 시각장애인이 치유받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부모를 불러 확인합니다.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불신을 드러냅니다.
내게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이 없습니까?
믿음은 충분한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함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20-23절)
부모는 아들이 눈을 뜬 것이 사실임을 알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출교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대답을 회피하고 진실을 덮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공동체에서의 안위와 평판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고 진리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위협과 협박이 있어도 진리를 은폐하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보게 하시고 본 것을 증언하는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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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망보다 수치를 두려워하는 자들 ]
찬송가 274장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죄인의 첫 번째 문제는 죄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죄인임을 폭로해 주십니다. 더러움을 인지하게 만드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또 문제가 생깁니다.
죄인임이 드러났음에도, 어둠인 것이 드러났음에도,
분명히 더러움을 인식했음에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꾸 감추려 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해결책을 취했던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죄를 들춰내는 빛을, 죄를 부각시키는 의(예수님)를 없애버림으로써
문제를 덮어버리려 하였습니다.
덮어버리고 끝내는 것은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덮어주시는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것으로 끝내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덮음을 통해 근본적으로 죄를 해결할 방책이
하나님께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덮음의 은혜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주요한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은
전범에 대처하는 태도에서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전쟁 범죄에 대해 이들이 취하는 아주 상반된 태도에 대해
어떤 분이, 죄책감의 문화와 수치심의 문화로 대조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독일인이 죄를 인정하는 시점은 죄책감을 느낄 때인데 반해,
일본인이 죄를 인정하는 시점은 수치심을 느낄 때라는 것입니다.
독일인의 경우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죄라고 인정이 되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배상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독일은 배상까지 하고 새 출발을 했습니다.
전범 문제로 독일과 시비 붙는 나라가 지금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자기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나쁜 놈이라고 몰리는 상황(수치스러운 상황)이 되기 전에는 아니라고 우깁니다.
우길 수 있는 힘이 있는 한 끝까지 우겨서 수치를 면하려 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은 주변 나라들과 전범 문제로 다툼이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지요. 우길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 문제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인 자가 눈을 뜨게 된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도
여전히 예수님을 죽이려 드는 바리새인들과 비슷합니다(22절).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길 수 있는 데까지 우기다가,
세가 불리해져서 수치를 당하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죄를 인정합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것보다,
인간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이 더 두려운 모양입니다.
아직까지 그들은 힘이 있으니 계속 우길 것입니다.
지옥 문 앞에 가서야 후회하게 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세상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이 함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멀리 있고, 우선 손에 있는 떡이 커 보이니 그것을 놓기가 싫습니다.
맹인이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를 묻고 있지만,
사실 확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사실이 아님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자,
이번에는 안식일을 범했다는 트집을 잡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죄인임을 자백하지 않고 버팁니다.
인식했으면 그냥 인정하면 될 텐데,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면서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승부가 갈립니다.
똑같이 은혜가 주어졌는데, 빛이 비쳤는데,
어떤 사람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애통하며 엎드리지만
어떤 자는 빛을 가리기에 급급합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8:45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배척합니다(5:42-43절).
주님,
사람의 눈이 무서워, 하나님을 무시하는 짓 하지 않게 권고하여 주옵소서.
멸망보다 수치를 더 두려워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사람은 존중하고 하나님은 멸시하는 죄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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