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1장 37절 -22장 11절
바울 사도는 천부장에게 끌려 영내로 들어가다가 말할 기회를 구한다.
헬라어로 청하는 바울의 지혜를 본다.
천부장이 무시하지 않고 긴장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복음을 반대하던 유대인 사울의 자신의 과거를 증언하고,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를 만난 체험을 이야기한다.
당시 일반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했는데 히브리어로 말함은
더 친숙함으로 다가가고자 한 바울의 의도를 본다.
예수님을 가감 없이 증언할 수 있는 선명한 경험을 주신다.
바울의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에만 세 번 기록되어 있다.
바울에게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자신을 변호하고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마다
그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증언은 사실을 진술하는 것으로, 결코 가하지도 감하지도 않은 말이어야 한다.
유불리를 따지며 경험하지 않은 것을 진술할 수 없고, 또 경험한 것을 뺄 수도 없다.
그래서 복음을 증언하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꾸미지 않아도 되는 분병한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증언자로 매일 주님과 만나는 분명한 경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한 분명한 경험이 없이는
확신과 자신감이 없어서 전하는 말에 힘이 없다. 영향력이 약하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경험한 사실은 상대가 누구든지 자신있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바울에게 이보다 더 확신에 찬 간증이 있을까?
예수님이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을 직접 찾아오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사건이야말로
사울이 사도로서, 이방인 선교사로서 가장 권위있고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누가 무슨말을 하더라도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이 체험이야말로
바울의 평생을 붙들고 이끄는 경험이었음이 분명하다.
처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영적으로 거듭나며 중생한 성령 세례 경험이야말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하는데 확신과 담대함과 든든함이 어디 있을까?
대학 시절 이 경험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린다.
바울은 군중들이 덤벼드는 어려움에서 이제 막 벗어났다.
그런데 헬라어로 천부장에게 말을 걸어, 자신을 애굽인 혁명가쯤으로 오해한 그에게
자신이 시골 촌뜨기가 아니라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지식인임을 밝히며 군중에게 말할 기회를 구한다.
( 다소는 길리기아 제일의 도시로, 로마의 교육도시 중 하나였으며 지적, 경제적 풍요로운 곳이었다.)
무리가 모인 상황을 활용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예수를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집단 폭행에서 간신히 벗어난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는 상황을 탓하며 복음 전하기를 회피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여름 베트남 비전트립에 난제가 등장했다.
외국인이 현지에서 진료를 하려면 베트남 의료인 통역사가 있어야 진료가 가능하다는 규정이 신설되었다.
선교사는 적절한 사람을 구하기가 거의 힘들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고 해결해야 할까?
어려우니 추석 연휴를 국내에서 쉬면서 보낼까?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할 제2의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오늘 바울의 모습이 큰 도전으로 찾아온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일이면 사람들은 늘 핑게거리를 찾아 일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사명자는 다른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는 달라야 한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중요하다.
소극적으로 외면하고 피하며 둘러가든가, 적극적으로 정면 대응하고 돌파할 것인가?
교회가 목회자의 성적 문제를 일으켜 권고 사임을 시키고 어려움에 처하여 있다.
그러나 [돌파]라는주제로 수요기도회를 가지고 있다.
단순한 위로와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하기만을 기대하지 않는다.
교회와 모든 성도 다음세대들에게도 전화위복,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바울은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억울하게 오해를 받아 집단 폭행을 당한 것이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그를 몰아붙힌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이들을 질책하지 않고 '부형들' 이라 애정을 담아 부르며 예를 갖춘다.
그리고 자신도 그들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이라고 소개한다.
바울은 사랑하는 동족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바울의 태도를 결정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대사임을 기억하고, 누구를 만나든 복음의 증인임을 기억한다면
우리 태도는 엇나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죽고 오로지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사는 삶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고 사는 삶이다.
교회를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자존심', '내'가 살아서, 내가 '주인'되어서 판단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그로 인하여 분쟁과 타툼이 일어나며,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다.
오늘 바울이 보인 모습이 도전을 준다.
늘 교회와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장로로서 섬겨 온 지난 시간들을 되집어 본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억울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인내했었다.
앞으로도 더욱 더 참고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섬기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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