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영성일기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변론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4. 6. 25. 09:52

본문 : 사도행전 26장 1 ~ 32절

 

베니게가 함께 온 분봉왕 아그립바 2세와 신임 총독 베스도 앞에서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변호의 기회를 준다.

 

바울은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에 정통했던 아그립바 왕에게

변론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자신의 말을 경청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는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소했던 변호사 더둘로의 아첨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더둘로는 없는 말을 만들어 아첨함으로 사람을 조종하려는 마음에서 말을 했지만,

바울은 사실에 입각해 칭찬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중히 부탁한다.

우리 말에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거짓을 곁들여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선하고 정직한 말로 사람을 세워주고, 담대한 복음 증거로 세상을 구원하는 입술을 가져야 한다.

진실한 말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고 권위가 있다. 

 

바울은 부활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던 바'라고 설명한다.

부활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오래 기다려온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 부활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 부활 신앙이다.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고난과 환란을 견디게 해주는 인내를 만들어 내고 천국 소망으로 무장하게 해 준다. 

더불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재림 신앙이다. 

 

사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은 메시아 사상이었다.

바울은 오늘 그 사상의 핵심이 부활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는 올바른  메시아 사상이 아니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에게서 부활은 남다르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인이었지만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야말로

그의 신앙과 믿음의 변곡점이 되었다. 

다른 어떤 지식보다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알아가는데 매달렸던 것을 기억한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을 위해 가졋던 열심은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그분의 백성을 핍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날뛰는 그의 모습은 주인의 지시를 거부하느라 가시가 박힌 채찍을 발로 차면서

도리어 제 몸에 상처를 입는 황소와 같았다.

주님을 멀리하면서 주님과 상관없이 열정만 내다가는 하나님의 역적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열심은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내게도 가장 안전하고 유익하다. 

기질적으로 어떤 일에 열심과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 또한 그런 아픈 과거가 있다.

이단들의 열심을 보라. 정통 교회 교인들보다 몇 배의 열심을 보인다. 

바른 지식 없이 단순 무식하여 맹목적으로 열심을 내는 자의 결과가 위험천만하다는 것을 본다.

물론 신앙생활 하면서 단순하게 믿는 것이 

매사에 따지고 믿지 않는 것보다는 좋은 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바르고 정확한 지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된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을 실천하신다,

그 은혜로 핍박자 바울을 용서하시고,

죄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주님의 종으로 삼으셨다. 

주님의 은혜가 품지 못할 죄인, 변화시키지 못할 악인은 없다. 

나는 주의 종인가 날마다, 때마다 자문해 본다.

고집 센 황소처럼 자기 길을 가던 내게 주님은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뒤돌아본다.

아니 지금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통치와 질서 지배하에 있지 않고

주인 노릇하며 살아가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간은 끝없이 주인노릇하려고 발버둥친다.

 

바울이 총독과 분봉왕 앞에서 복음을 변호하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붙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던 바울이 그 자리까지 설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없었다면 우리 역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오늘 이 자리도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간섭하심, 섭리와 경륜 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이 전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바울을 부르셨고, 그 자리까지 보호하고 인도하셨다.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부름 받은 이유와 목적을 알았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바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전했다.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 나를 자녀로 부르셨는지, 나의 오늘과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는 자주 잊고 살아간다. 삶의 이유와 목적을 망각하고 살 때가 많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베스도는 바울이 해박한 지식에 놀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미쳤다'이다. 

그는 복음을 인정하지도, 겸손히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복음을 폄하하고 거부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찾아온 구원의 기회를 저버리고 만다.

세상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난하고 거부하고 심지어 핍박한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만이 그들을 회개와 죄 사함과 성령을 통한 새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은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부와 권력을 드러내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앞에서 수의를 입은 미결수 바울이 자랑스럽게 외친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게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고귀하고 소중함을 아는 자의 고백이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빌 3:8)는 말 그대로이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가치를 아는 것은 그 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가졌는가?

 

성령님

이 땅의 삶에 매이지 않고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하소서.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분명히 알게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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