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2. 12. 07:31

본문 : 누가복음 2장 21-40절

 

천사가 일러준 대로 이름을 예수라 하고,

율법에 첫 태에 처음 난 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려고,

아기 예수가 태어난지 팔일 만에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으러 성전에 올라간다. 

가장 가난한 자들이 바치는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 비둘기 둘로 제사한다.

 

성전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과 안나를 만나

그들의 고백과 찬양과 예언을 듣고 본 고향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간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지 팔 일째 되는 날 예루살렘 성전에 '거룩한 자'로 드려지게 된다.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의례이고, 가난한 이를 위한 제물(비둘기)을 바친 초라한 예식이지만,

천사가 예고했던 '거룩한 이'(1:35)가 역사 속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존재만으로 귀신들이 벌벌 떠는(4:34) '거룩한 자'의 등장은

사탄이 통치하는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이다.

 

성령을 통해 시므온에게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날을 기다리라고 하신다.

성령의 역사는 한순간에 임하는 극적인 체험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의 진득한 기다림이기도 한다.

시므온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될 날을 기다리며

날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 기다림 속에서 이스라엘의 위로가 단지 유대 민족의 독립이 아닌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어 온 세상을 회복시키는 구원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그 기다림 속에서 아기 예수를 안았을 때

마침내 그 위로가 현실로 다가왔음을 알았을 것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매일 말씀에 귀 기울이는 우리 또한

시므온에게 임하셨던 그 성령에게 잠겨 있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이방의 빛이며, 만민의 구주시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비방을 받는 표적'으로 배척과 배반, 고통과 고난의 생애를 보낼 것이다.

모든 사람이 환대하지 않더라도 인생의 패함(심판)과 흥함(구원)은

그분을 향한 태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주님 길을 따라가는 나의 자세는 어떤가?

'십자가의 도'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며 오랬동안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섬기던 안나는

'마침 이 때' 예수를 만나 자신처럼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이들에게 '예수'를 전한다.

그녀의 생애는 과부의 '기구함'이 아니라, 선지자의 '기다림'이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느슨해진 헌신의 끈을 동여매자.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게 하소서.

 

우리는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자들이다.

나에게는 시므온과 안나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과 자세와 사모함이 있는지 점검하는 아침이다.

부활신앙만으로는 종말시대를 살아기가 쉽지 않다.

재림신앙으로 무장하고 확실한 소망을 붙들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통치하심이 있어야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안나와 시므온처럼 평생을 말씀과 기도로 살아야 영적 민감성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초대교회 오순절 역사같은 모습만 기대하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매일 매일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세미한 음성과 인도하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시므온도 자신의 기다림에 대한 바른 인도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시대는 말세지말을 향하고 있다.

많은 자연 환경의 변화와 사람의 생각과 모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주님의 오심의 발걸음이 점점 더 가까와짐을 느낀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난 시므온과 안나는 얼마나 흥분되고 기뻤을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진정한 평화와 영원한 안식이 있는 그 날을 사모하면서

오늘도 마라나타를 외치며 기도한다.

사랑하는 주님이 공중에서 내 이름을 부르실 때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