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회복 그리고 관계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6. 6. 09:28

본문 : 역대상 9장 1-34절

 

이스라엘의 긴 족보 이야기가 끝이 난다.

9장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성전 재건과 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계보와 직무를 소개한다.

일반인과 제사장, 레위인, 느디님 사람들이다.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온 자들과 성전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온 자들의 명단이다.

오늘 이런 당대의 사람들을 소개하기 위해 긴 조상들의 족보 이야기를 써내려왔다.

 

포로 귀환은 성전 중심의 이스라엘이 회복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단순환 포로 귀환이 아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쌓는 것은 회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늘 성전에서, 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며 교제하는 삶의 회복이 진정한 회복이라 생각했다.

이 회복의 중심인 이스라엘의 왕도, 예루살렘에 성전 재건을 위해 

안정되고 새롭게 정착했던 바벨론을 떠나 1,400km 긴 여정을 감수해야 했던 그들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은 어떤 특권이나 부귀영화를 바라고 온 자들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서 고생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자들이다.

살기 좋은 정착지 평야 지대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살기 위해,

문지기로, 장작을 패는 일을 위해, 전병을 굽기 위해, 향품을 준비하기 위해,

24시간 성전 골방에에서 찬양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나는 어떤 수고를 하고 있는가?

하나님과 교제의 막힌 담을 허물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오늘도 새벽을 깨운다.

나의 식어진 열정, 열심, 포기해버린 것들, 낙심하고 상심한 것들, 기대와 희망을 놓아버린 것들,

다시 일으켜 세우고 회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만이 나를 살리는 길이다.

말씀과 기도만이 답이다. 

성령의 은혜를 구하고 또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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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첫걸음 ]

 

묵은 땅을 갈아 엎으신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범죄함'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 세우고자 포로기라는 혹독한 시간을 주셨다.

철저히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면서,

성전에서 봉사할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을 먼저 거주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을 성전 중심으로 재건하기 위함이다.

농부가 묵은 땅을 갈아엎는 것처럼, 하나님은 죄를 범한 자기 백성을 반드시 새롭게 하신다.

땅의 기초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새롭게 되어야 할 나의 묵은 땅은 무엇인가?

 

다양함 속의 질서를 기뻐하신다.

레위인의 성전 업무는 제사에 사용될 기구를 관리하는일, 재료들을 만들거나 보관하는 일,

떡과 전병을 준비하느 일, 찬송하는 일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작은 일이라고 실망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자기 일에 자부심을 품고 서로 존중할 때 성전은 성전다워진다.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의 큰일보다 여러 사람의 작은 일로 세워진다.

나의 작은 일도, 작은 일을 하는 타인도 모두 귀하게 여겨야 한다.

 

지도자는 어려운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직후 예루살렘은 황폐하고 외적의 침입에 취약했다.

재대로 정비되지 않은 예루살렘으로 먼저 이주해 사는 일은 위험했다.

그러나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족장(우두머리)들이 앞장섰다.

그들은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위험을 무릎썼다.

우리 공동체의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내가 앞장서야 할 일은 무엇인가?

 

작은 것을 지키는 일이 거룩함의 시작이다.

문지기의 직무 자체는 소박하지만,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장소를 지키는 일이기에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을 행할 사람들을 택하시고, 중요한 직분으로 여기신다.

큰 일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거룩함을 지키려고 먹는 음식조차 구별했던 다니엘처럼

오늘 내가 지켜야 할 작은 일은 무엇인가?

 

삶의 작은 일에도 말씀대로 행하여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당당한 일원으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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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의 계보 ]

​드디어 당대의 계보가 나옵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자들, 그 중에서도 정통왕국 유다의 왕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의 이름들이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족보입니다.​

가장 먼저 돌아온 자들 중에 일반 백성도 있었지만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그리고 성전 막일꾼들입니다(2절). 

일반 백성의 대부분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3절). 

에브라임 자손과 므낫세 자손도 일부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족보로 표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극소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본래 예루살렘 가까이 살았던 자들의 후손입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살았다는 것은 성전 가까이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성전 가까이 살았던 자들의 후손이 또다시 성전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성전 가까이 살면서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되찾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성전 막일꾼들이 무슨 특권을 누리겠다고 앞장서서 성전으로 돌아왔겠습니까? 

성전을 가까이했던 삶의 기억이 그들을 또다시 성전 가까이로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그 직임대로 계수됩니다.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레위인은 레위인대로, 

레위인 중에서도 문지기, 그릇 맡은 자, 향품 맡은 자, 전병 굽는 자, 찬송하는 자 다 제각기 맡은 직분에 따라 구분됩니다. 

레위인들 중에 가장 힘든 일을 맡았던 므라리 족속이 계보의 가장 앞에 등장하는 것은(14절)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자기 직분에 전념하였고 심지어 찬송을 맡은 자들은 

성전 내 골방에 거주하면서 24시간 상시 대기하는 가운데 섬김을 감당하였습니다(33절).​

각기 다른 직분으로 섬겼지만 이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거주하는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범죄로 징계를 받았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안으로 하나가 되어 들어왔습니다. 언제나 예루살렘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계보와 직분, 책임으로 봉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계보를 허락하십니다. 구별을 허락하십니다. 

파벌과 분리, 대립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십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진정한 사랑은 각자의 개성을 말살하고 한 개체로 흡수 통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독립된 인격을 유지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참 사랑은 둘이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이면서 하나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취미나 기호가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동호회 그룹이 아닙니다. 교회는 또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선교 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너무도 다양한 지체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을 느끼기가 더 어렵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선교단체나 또래 그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분들이 교회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맞지 않고, 문화도 다른 다양한 계층들과의 교제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각양 지체가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배우고 훈련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아가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우리 안에 부어주셨습니다.

그것을 발굴하고 끄집어내는 실습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선교단체, 동호회 그룹에서는 이런 실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온갖 잡탕이 다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머리 되신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가는 놀라운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서로 다른 개체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섬기는 일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힘이 들어야 이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예배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앞장서서 돌아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성전을 가까이했던 사람들, 성전 예배에 몸으로 힘들게 봉사했던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장 가까이 살았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주축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전 예배에 몸으로 직접 봉사했던 제사장들, 레위인들, 느디님 사람들(성정 막일꾼들)이었습니다. 

레위인들 중에도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을 맡았던 므라리 족속들의 계보가 가장 앞에 언급되었습니다.

몸을 쓸 때, 몸이 힘들도록 섬길 때, 마음이 쓰이고 마음이 깊어집니다. 

몸이 힘들도록 섬길 때 불평이 없어집니다. 불평할 겨를이 없어집니다. 자기 부인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각자가 자기 일을 전념하여 할 때 공동체가 온전히 세워집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 합당한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롬 12:1).

몸을 쓰지 않고 마음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없습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집니다.

우리에게 각자의 구별된 개성과 역할과 삶을 주신 하나님, 

그러나 그 각각의 역할과 삶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머물겠습니다. 언제나 교회를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몸을 써서 섬기겠습니다. 몸으로 섬기지도 않으면서 ‘교회가 왜 이 모양이야?’라고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겠습니다. 그 안에서 내게 주신 역할에 전념하겠습니다. 

동시에 다른 이의 역할과 개성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참견할 여유가 없도록 맡은 일에 힘을 다하겠습니다. 

힘을 다하여 섬길 때 교회를 향한 사랑이 깊어질 줄 믿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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