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역대상 13장 1-14절
다윗은 예루살렘에 왕도를세우고 다윗성을 건설하고 나서 하나님의 궤를 생각한다.
많은 지휘관들과 레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기럇여하림에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하여 모든 백성을 불러 모은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웃사와 아히오가 수레를 몰며 나아오자 다
윗과 온 이스라엘 무리가 힘을 다해 뛰놀며 노래하며 연주하는데
수레를 몰던 소가 놀라 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손으로 궤를 붙들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웃사를 치자 그 자리에서 죽었다.
호사다마였는가?
다윗이 노하고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하고 궤를 옮기는 것을 중단하고 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다.
그런데 석 달 동안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렀는데 오벧에돔의 집과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만큼 바라고 원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전쟁 중에도 모시고 다녔다.
그리고 언약궤가 있는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마음과 믿음의 중심이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은혜로
우리 안에 임재하여 계시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독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될 수도 있다.
오늘 웃사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경홀히 여기고 함부로 취급하고 무관하게 행동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겸손하고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가면 오벧에돔처럼 복을 받는다.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고 구하며 노래한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나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봐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과 마음과 행동에 따라,
저주가 될 수도 있고 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나의 의도가 무엇인지, 나의 모습과 마음은 어떠한지 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빛이시다. 구원자이시고 주가 되시는 분이시다.
역으로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시고 심판의 하나님이시기고 하다.
오늘도 성령님의 충만한 내주하심을 바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나의 마음을 정결케하기 위해 회개의 기도를 올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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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축복 사이에서]
의도가 선하더라도 방법이 옳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신다.
율법에 따르면 언약궤는 고리에 채를 끼워 레위 사람이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하지만(출 25:12-15),
다윗은 예전 블레셋 사람이 그랬듯(삼상 6:7-12) 수레에 실어 옮겼다.
웃사는 거룩한 물건에 몸이 닿으면 죽는다는 말씀(민 4:15)을 어기고 궤에 손을 댔다가 죽었다.
하지만 언약궤를 보관한 오벧에돔의 집에 하ㅏ님이 복을 주셨으니,
이는 다윗 일행이 언약궤를 합당하게 다뤘다면 복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하나님이 막으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면 복을 주신다.
우리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을 점검해 보자.
목적만 선하면 되는 게 아니라 방법도 옳아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계획을 천부장, 백부장, 지휘관과 의논한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레위인을 모으고, 이스라엘 전성기 시대의 남족 끝(애굽의 시홀 시내)부터
북쪽 끝(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렀고 '뭇 백성'이 이를 선하게 여겼다.
소수 영웅들이 밀실에서 모의한 계획이 아니었다. 다윗은 주의 일을 혼자 성취하고 인정받으려는 탐욕을 내려놓고,
다 같이 이루려는 선한 열심과 겸손으로 소통의 창을 열고,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의 의견을 들었다.
사람들에게 묻고 기꺼이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결정할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이 둗고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듯을 무시한 사울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기 원했다.
그래서 사울의 통치기간 내내 기럇여하림에 방치되었던(삼상 7:2)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판'(대상 28:2)으로 불렀는데, 이는 언약궤의 상판인 속죄소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말씀하시는 자리였기 때문이다(출 25:22).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것이 다윗의 바람이었고 우리가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이유이다.
실패와 성공 사이에서, 하나님께 묻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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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주도적인 열심과 목적주의의 위험 ]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 야심 차게 진행한 하나님의 궤 이송식은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말 어떤 존재인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 다윗이 있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냥 넘어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그러나 사랑하시며 택하신 자였고 높은 수준을 기대하셨던 다윗이기에,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인본주의적 생각과 태도를 통렬하게 지적하시고 깨뜨리십니다.
이에 반응하여 다윗도 통렬하게 반성하였습니다.
10절과 11절의 '진노하사'와 '노하여'는 동일한 동사로서, 문자적인 뜻은 '뜨거워졌다'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단순히 성을 내신 것이 아니고, 다윗도 감히 하나님을 향해 분을 낸 것이 아닙니다.
통렬한 마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뼈아프게 새겨야 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의도나 동기가 선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과정, 방법까지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지시하시는 대로 따를 때 온전한 예배가 됩니다.
언약궤를 일찌기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울 곳으로 지목하신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옮기는 시기, 과정, 방법까지 세세하게 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야 합니다.
의도나 동기뿐만 아니라, 모든 방법까지도 선악의 판단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레스 웃사'의 충격요법을 통해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실수하기가 쉬운 부분입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목적이 ‘궤 앞에서 묻기’(3절)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언약궤를 이동하는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좋은 의도와 목적으로 하는 일이니 방법은 크게 신경쓰지 않은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라고 맡겨주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어떤 사소한 것도 우리의 소견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좋게 여기고 뭇 백성이 좋게 여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2절, 4절).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진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의라 하더라도 내 생각과 소견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고 노엽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때에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었다고 반성하면서도,
정작 궤를 옮기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소상히 묻지 아니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좋게 여기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땅에 전령을 보내어 모이게 하고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웃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 여겨, 손을 펴서 여호와의 궤를 붙들었습니다.
전령을 '보내어'와 동일한 동사가 손을 '펴서'로 번역된 동사입니다.
임의로 결정하고 충동적으로 전령을 보내어 언약궤를 옮긴 것처럼
웃사가 손을 편 것도 그러하다는 의미를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무 잘못 없는, 선의의 웃사를 치셨는지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전령을 ‘보내어’와 손을 ‘펴서’에 의도적으로 동일한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가 의도적으로 반복 사용되었다고 판단되는 것은
2절에 ‘전령을 보내어’를 표현할 때 베레스(페레츠)의 동사형인 ‘파라츠’를 굳이 같이 사용한 점 때문입니다.
‘파라츠’는 ‘돌파하다, 터뜨리다’의 뜻입니다.
이 동사를 ‘보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샬라흐’와 나란히 연결하여 사용했습니다.
‘전격적으로(어떤 의미에서는 충동적으로) 터뜨리자, 보내자’ 이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과감하게 터뜨려 보냈는데, 웃사도 손을 과감하게 뻗었고(보내었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웃사를 치셨습니다(10절).
정작 10절에 ‘치시매’에는 다른 동사(나카)를 사용했지만,
11절에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다’는 표현에는 파라츠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웃사에게 페레츠를 파라츠하셨다’입니다.
파라츠를 두 번 사용하여 강조함으로써 2절에 사용된 파라츠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굳이 웃사를 죽이셔야 했을까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면, 다윗이 고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며 버텼을까요?
순종의 사람 다윗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웃사를 파라츠(개역한글은 ‘충돌하다’로 번역)하시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이 일을 중단시키셨을까요?
단순한 방법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근본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속단하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 태도의 교정에는 충격요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냥 말로 가르치고 훈계하셨다면, 소리를 질러 교정시키셨다면, 똑 같은 잘못이 다음에도 계속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그렇게 지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섬김의 태도는 적극적인 수동성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자발적’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키지도 않는 것을 하는 자발성, 능동성을 발휘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자발적인’것보다 ‘순종’에 더 방점이 찍혀야 합니다.
오벧에돔의 경우와 같이 억지로 떠맡겨진 짐을 순종으로 감당하는 것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봉사보다 나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나서는 능동성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알아서 잘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는 잘 나서지 않는 피동성과,
그 뜻이 분명해진 경우 기쁨으로(소극적으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수동적으로 일하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성취감이 떨어집니다.
수동적인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일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내가 주도하고, 내가 중심이 되어야 성취감도 있고 일할 맛도 납니다.
다른 사람이 세워 놓은 계획에 맞추어 열심히 움직이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기성교회 부교역자보다, 개척교회 담임 목사가 더 낫습니다.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통렬하게 지적하십니다.
알아서 하는 것, 주도적으로 하는 것 좋아하지 말라고요.
사소한 문제라고 여기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처리했는지...
주님, 잘못했습니다.
다윗의 자존심을 구기시면서까지, 불쌍한 웃사를 죽이시면서까지 가르쳐 주신 교훈 명심하겠습니다.
부교역자 시절에 받았던 훈련을 되새기겠습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지체로 사는 삶, 머리가 아닌 지체로서 섬기는 삶, 잘 감당하겠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도 꼭 묻고,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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