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박영호 목사 글에서 옮김
성경, 한글 그리고 한국인의 삶
[ 문자를 깨우고 정신을 일구다 ]
한국인의 성경 사랑
그리스도인은 '한 책의 백성'으로 불린다.
경전이 없는 종교가 없고 경전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은 모든 문화에 있지만, 기독교는 독특하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의해 형성된 백성이며,
성경은 그 백성의 삶을 통해 세계 역사에 광범위하게, 그리고 심도 있게 영향을 끼쳤다.
세계의 많은 민족 중에서도 ' 한 책의 백성'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이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한국인들의 성경 사랑은 유별나다.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부총무로 사역햇던 F.G. Vesey의 말을 들어 보자
"일반적으로 말해 한국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사랑하는 영혼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교인들을 만나 보면 책이라고는 성서 한 권만 갖고 있는 경우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난생처음 소유한 것도 성서이고 처음으로 읽어본 책도 성서인 경우가 많다.
한글이 배우기 쉽고 그래서 한글을 깨친 후 처음 읽어 본 그 책에 담긴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
마침내 성서가 그에게 양식과 음료(요 6:55)가 되었다.
성서 없이 예배당에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집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예배당에서 읽는다.
성서에 담긴 깊은 뜻과 교훈을 깨우치고 배우려는 이들의 욕구는 한이 없다."
읽어 보거나 가지고 있는 단 한 권의 책이 성경인 집이 많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성경이 넓은 계층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는 말이고,
성도가 남의 가르침을 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성경을 읽기를 원했다는 방증이다.
성경을 통해서 문맹의 세계에서 문자의 세계로 옮겨 간 이들이 많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이 성경만 읽었을까? 일단 넓어진 세계가 그들의 정신과 삶의 지향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이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넓고 깊다.
한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성경을 만나다.
성경이 이토록 한국인의 삶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던 배경에는 '한글'이라는 탁월한 문자가 있었다.
선교사 J.S. Gale은 아래와 같이 전한다.
" 한국의 토착문자는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것임이 분명하다.
1445년 창안 되었음에도 너무 오랫동안 먼지 속에 묻혀 지내면서 자신을 알아줄 이를 기다렸다.
쓰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너무 쉽다는 이유로 그동안 경멸을 받아 왔다.
한 달 정도면 깨칠 수 있으니 그처럼 쉬운 글이 또 있을까?
바로 이와 같은 신비로운 섭리 가운데 그 문자는 신약성서와 기독교 문서를 찍어 내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까지 성서와 기독교 문서를 대부분 놀랄 정도로 간편한 이 문자를 통해 인쇄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놀라운 섭리라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문자가 4백 년의 긴 잠을 자다가
마치 자명종 소리에 놀라 깨어나듯 이제 일어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양 전통에서 경전은 존중받는 언어인 한문으로 간행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은 달랐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는 1874년 압록간 근처에서 조선 상인들과 교류하며 한글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로스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 한국인 조력자들과 함께 성서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중국 심양에 문광서원을 설립하고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한글로 발행했다.
이 책들은 당시 서북방언으로 번역되었으며, 요한복음은 서북말 판과 서울말 판 두 가지로 출판되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의 경전이 무지한 백성과 여성의 언어로 취급받던 한글로 번역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글의 도움으로 백성에게 깊이 다가갔을뿐 아니라,
천대받던 한글이 일거에 존중받는 경전의 반열에 헌정된 일이었다.
동양 전통에서 경전을 읽는 것은 지식인이나 성직자들에게 한정된 일이었다.
서민 대중이 종교에 열심을 내더라도 의례에 참여할 뿐이었다.
성직자만 경전을 읽고, 대중은 듣는 것 또한 의례적인 면이 강했다.
스스로 읽고 생각하고 이해하기를 요구하는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특성이다.
경전에 대한 존중은 소수의 특권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읽고 행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종교적 시설에 고이 모신 경전이 아니라, 서민들의 땀이 배고 흙먼지가 묻는 성경이야말로 진정으로 거룩한 책이다.
백서을 긍휼히 여겨 만든 글과 그리스도교의 성육신 신학이 만나 한글성경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1882년에 근대농학을 공부하러 왔던 이수정이 한문 신약성서를 읽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게 된다.
그는 본래 유학 목적을 포기하고 "모든 책 중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하여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한다. 처음에는 한문 성경에 토를 다는 식으로 작업하다,
평민들도 읽을 수 있도록 순수 한글 번역으로 궤도를 수정한다.
이미 로스 역이 나온 것을 알고 있었지만, 로스 역이 서북 사투리로 되어 있었기에 중부지역에서는 읽히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말로 통용되던 언어를 글로 옮길 때에 봉착하는 한계를 인지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성경번역에서 시작된 점에 주목할 만하다.
한글문화, 성경과 함께 자라 가다.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개신교 선교사로서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디뎠을 때,
이미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들고 있었다는 것은 세계 선교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일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도착 즉시 한국어 공부에 매진했고 성경 번역을 도모했다.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였기에 한국어 성경 번역은 처음부터 교단 연합으로 진행되었다.
1887년 선교사들은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서울 배재학당 내에 한문, 영문, 한글 인쇄가 가능한
'미이미교회인쇄소'(The Trilingual Press)를 설립했다.
이 인쇄소에서 한글 조판 일을 하던 청년 주시경은 한글의 우수성과 효율성을 깨닫고 평생을 한글 연구에 바쳤다.
주시경의 제자인 최현배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거룩한 뜻이 기독교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성경과 한글의 만남은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위상을 드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1년에는 신구약 66권이 순한글로 인쇄되어 나왔다.
역사가 이덕주는 "15세기 한글 창제 이래 '한 권의 '책을 통해 가장 많은 어휘와 문장을 담은 것이 되어
한글로 모든 사상, 모든 사물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평한다.
한글 성경의 번역은 한국어와 한국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병철은 성경 번역을 통해 "한국의 새로운 스타일을 가진 문체와 기독교 문학을 낳았고,
사상계의 비옥한 토양토를 주었으며, 개화기 이후의 신문학은 정신적으로나 문체상으로
가장 훌륭한 언문일치라는 모범을 여기서 발견했던 것"이라고 평가한다.
최태영은 성경 번역이 문맹 퇴치, 한글의 정착, 우리말 연구의 기초 마련, 어휘의 증가, 한글 수호,
그리고 언문일치 문체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개역성경의 체계는 오랫동안 한국어 문장의 기준이 되었고, 교과서와 신문 언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야소교(예수교의 취음)"라고 하며
"아마 조선글과 조선말이 진정한 의미로 고상한 사상을 담는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최초일 것이요,
만일 후일에 조선 문학이 건설된다 하면 그 문학사의 제1항에는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 것이외다(1917)"라고 전망했다.
조선 민중, 성경 안에서 새 세계를 만나다.
이 전망에서 우리는 춘원이 성경의 기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으나,
조선 문학의 미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17년은 나라의 미래가 지극히 어두워 보였던 시대였다.
후에 한글은 학교 교육과 관공서에서 추방되고 공식 석상에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금지어'가 되었다.
일제가 일본어 성서 사용을 강요하지 않았기에 교회는 암울한 시기에 한글이 공적으로 사용되는 유일한 기관이 되었다.
이덕주는 이러한 교회의 역할을 두고 "성서에 '한글의 마지막 지킴이'라는 별명을 붙여 줄 수 "있다고 평가한다.
한글 성경을 읽게 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자연스럽게 문맹퇴치운동으로 발전했다.
당시 인구의 90% 이상이 글을 읽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는 세례 자격으로 복음서 읽기를 요구했다.
1911년에 발행한 성경에는 한글자모표를 싣기도 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한글을 배우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을 이끈 음성이 "집어 들라. 읽으라"(Tolle, Lege)였다면,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끈 음성은 "배우라. 읽으라"(Disce, Lege)였다 할 수 있다.
글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성경을 읽는 것은 "낯설고 새로운 세계"(The strange and new world)에 발을 딛는 것이다.
한글 성경을 통해 조선의 민중들에게 이중적 자각이 생긴 것이다.
성경 안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한 이들이 식민의 현실에 수동적으로 체념하고 있기는 힘들었다.
옥성득은 성경읽기의 영향을 이렇게 말한다.
"성경을 일고 자란 첫 세대라 할 수 있는 1910년대의 기독 학생들
- 1912년 105인 사건 때 검거된 선천중학교 학생들, 1919년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학생들- 은
민주주의, 민족주의, 독립의식이 강했다.
맥켄지는 성경을 읽은 세대가 폭정을 만나면 그 세대가 멸절되거나 폭정이 종식된다고 평가했다."
교회는 태극기 게양, 애국가 보급, 고종 탄일 경축회, 한글 보급 및 토론회 등의 활동을 펼쳤고,
이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서 및 사회의식을 고양시켰다.
전체 인구에 비해 아직 소수였던 교회가 공적인 공간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성경,한글과 민족혼의 보루가 되다.
주시경, 최현배 등 많은 한글학자가 모두 교회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베재학당, 이화여전 등 미션스쿨은 한글 연구의 요람이었고, 종교가 언어 체계 발전을 촉진하는 교차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글은 비로소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모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영화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한글 어휘를 정리하며
조선인의 정신을 지켜 나가는 운동이 정치적 탄압을 받는 과정을 잘 그려 냈다.
비록 영화의 내용은 허구이지만, 한글 연구 노력이 민족혼을 지키는 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교회학교, 특히 여성교육에서 한글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유교사회에서 여성에게 글은 금기시되었지만,
기독교는 여성을 교육의 주체로 세웠고 한글 성경은 그 교육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는 여성의 문해력 향상, 주체성 확립, 나아가 사회 참여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미션스쿨은 기회균등, 남녀평등, 근로에 대한 인식, 자주자립에 입각한 민족정신 고양, 개인의 개성 존중,
근대적 시민 소양, 봉사자로서 자질 함양을 목표로 설립되어 한국 근대 교육의 교량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에 성경을 판매하러 다니는 이들을 '권서'(勸書,colporteur)라 불렀다.
권서들은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성경책을 권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며, 신자들을 양육하는 일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헌신과 열정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모범을 보여 주었다.
하디 선교사는 1896년에서 1908년 사이에 남감리회가 설립한 225개 교회 중
대부분이 권서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보고했다.
배시 선교사는 권서들이 "감옥소, 병원, 나환자촌, 창녀촌, 도박판, 아편소굴, 궁궐, 상점, 사찰, 가난한 초가집,
어부의 거룻배, 뱃사공의 나룻배, 학교와 대학"까지 들어가서 '중생한 자'를 만들었다고 보고했다.
옥성득은 권서들을 통하여 "성경은 한국인의 첫 근대 서적이 되었으며, 서책의 근대적 보급망이 개척되고,
책 대중화의 시대를 열어 민주주의 기초를 형성했다"고 평가한다.
일제는 권서들이 민족의식의 확산 통로가 되는 것을 알고 단속과 탄압을 강화하기도 했다.
한국 점자출판의 역사
한글 성경의 역사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출판을 빼놓을 수 없다.
한글 점자는 송암 박두성이 만들었다. 박두성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인천의 송암맹아학교(훗날 재건학교)에서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면서 일본식 점자의 불합리함을 체감하고 한글 점자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1913년에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서 한글 점자 개발에 착수했고,
1926년에 훈맹정음이라는 독창적인 한글 점자 체계를 창안했다.
점자가 시각장애인들의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여 총독부로부터 훈맹정음 교육 승인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는 시각장애인 교육이 장애인 교육이나 자선사업을 넘어
시각장애인계를 이끌어 갈 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그는
1931년에 성서 점역에 착수하여 신약성경 점역을, 1957년에 성경 전체 점역을 완성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이며 누구나 배울 권리가 있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교회들에 지원을 호소했으며,
많은 교회들, 특히 여선교회 등 교회 여성들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헌금과 옷, 교재를 기부하는 활동에 동참했다.
성서공회는 인쇄 자체 등을 지원함으로 협력했다.
한글 점자의 역사는 한국교회가 약한 이들의 삶에 소망을 심는 일에 헌신했음을 보여 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한글 성경의 역사가 주는 도전
오늘날 스마트폰 성경 앱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는 한글 성경의 한 줄 뒤에 숨겨진
수십 년의 헌신과 혁신, 저항과 성장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한글 성경은 한국어를 일으켰고, 한국인은 그것을 통해 문해력을 길렀으며, 세계와 소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자 혁명'을 넘어, 한국인의 '정신적 근대화'를 이끈 중요한 도구였다.
성경은 한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한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 내렸고,
한글은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다.
이 둘의 극적인 만남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자, 문학, 교육, 그리고 민족정신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겼다.
이제 이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이어 가고 발전시켜 나갈지 우리가 응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