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7. 토요일
창세기 11:31-12:9
- 데라의 죽음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 명령과 약속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가나안 땅으로의 이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 약속과 예배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
아브람이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의 기록이다.
왜 나홀의 이름과 그의 아내 밀가 그리고 하란의 딸 이스가는 언급되지 않는다.
아브람이 며느리를 삼기 위해 종 에벤에셀을 보낸 곳은 하란이었음을 보면
나홀도 같이 동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이 없었는데
데라는 무슨 이유로 식속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여 떠났는가?
왜 하필이면 가나안인가?
신약에서는 아브람이 갈대아의 우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기록하지만
창세기에서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기 전에 데라가 취한 행동이었다.
데라는 하란에서 얼마를 거주하였을까? 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안했을까?
아브람이 하란에서 모은 재산이 어느 정도는 있었던 모양이다.
재산이 축척될 정도의 세월을 보냈다는 말이다.
'그가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라고 기록하고 있다.
궁금한 것들이 있지만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쉽게 말하지만 그것과 동일한 의미일까?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데라와 함께 맨 처음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가나안으로 향하여 떠난 것인가?
성령 하나님
갈바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 말씀을 따라 길 떠나는 아브람을 생각합니다.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지한 인생의 길이 되어 주시고 인도자 되어 주시옵소서.
삶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 되어 주소서.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인생 되게 하소서.
내 인생 가운데 만나는 많은 문제와,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따라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의료기관평가 인증이 나를 이 병원에 머물게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조사위원으로 이 일을 지금까지 하게 하셨던 것이 이 때를 위함인가?
병원이 나를 대하는 홀대에 자존심이 상하여 떠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지만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 결정할 것이다.
하나님 보다 앞서지 않고 아브람처럼 순종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나보다 나의 앞길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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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신 곳을 향하여 ]
데라가 멈춘 자리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다시 불러내십니다.
두려운 명령에도 순종한 발걸음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며,
동행 가운데 새 길을 여십니다.
(12:1-3)
순종하는 자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떠나라는 명령은 모든 의지처를 버리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공허 위에 일곱 겹의 약속을 세우셨습니다.
"큰 민족이 되게 하시고, 복을 주시며, 이름을 떨쳐, 복이 될 뿐 아니라",
" 아브람을 축복하는 이에게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이에게는 저주를 내리심으로",
" 땅의 모든 사람이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불확실한 모험이 아니라, 이미 보장된 약속의 길입니다.
오늘의 순종은 내일의 축복을 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12:6-9)
동행하며 위로해 주십니다.
아브람이 세겜에 이르렀으나 그 땅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착의 희망은 희미하여, 그저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곳곳마다 나타나셔서 언약을 다시 들려주시고,
이에 아브람은 제단을 쌓아 응답했습니다.
믿음의 길은 현실의 고단함을 피해 가지 않지만,
그길을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주저앉지 않습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이겨 내야 할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31-32절)
멈춤은 때로 죽음의 다름 이름입니다.
데라는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참조 행 7:2-4)
하란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부르심의 걸음을 멈춘 자리는 결국 생명을 멈추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데라의 멈춤은 안식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명을 잃은 자리였습니다.
나의 걸음을 가로막는 안락함은 무엇입니까?
머무름은 순간 편안할지 몰라도, 사명을 놓친 삶에는 생명이 머무르지 않습니다.
( 12:4-5)
아브람은 데라가 멈추어 선 사명의 걸음을 이어받아 끝까지 걸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나아갔고(히 11:8),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변함없이 이어 간 순종이었습니다.
실패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민 23:19)에 순종하는 자는 말씀의 성취에 참여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미완의 순종을 이어 가야 할까요?
멈추지 않고 부르심을 따르게 하시고, 걸음마다 동행하시는 주님을 깊이 신뢰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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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젖과 믿음의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
찬송가 246장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데라가 그의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본토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하란에 머물렀습니다(11:31).
그러나 그의 가나안을 향한 소망은 장자 아브라함을 통해 이어집니다.
아브람은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5절).
‘마침내’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가나안 땅에 가게 된 것이 아니라,
가다 보니 그 땅이 좋아 보여서 정착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나안 땅을 목표로 해서 떠났고,
대를 이어온 여정이 결실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데라가 가려 하였고 아브람이 아내와 조카 롯과 모든 소유, 모든 가솔들을 이끌고
마침내 들어간 가나안 땅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를 말입니다.
평범한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형통한 삶을 허락하시고,
믿음의 큰 획을 그은 조상들에게는 오히려 평탄하지 않은 여정을 걷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단순히 기름지고 소출이 풍성한 땅일 수가 없습니다.
참 생명을 얻게 하는 믿음을 생산해내는 땅이어야
그 땅이 진정한 의미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가나안 땅은(7절),
언제나 풍요로운 소출이 보장되어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11:10-12] 10.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꾸준한 노력을 하게 되면 풍요로운 소출이 보장되는 땅은 오히려 이집트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노력과 실력으로 잘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만 젖과 꿀이 보장되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데라가, 아브람이, 모든 소유와 모든 가솔들을 이끌고 들어간 땅은 바로 이런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자기 부인의 믿음을 훈련시켜주는 땅, 믿음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가라 명하시면서 약속하신 복도,
세상의 풍요와 창대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이어받은 족속의 이름이
‘이스라엘 족속’인 것이 이런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왜 아브라함 족속이 아니고 이스라엘 족속일까요?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 야곱의 후손들만 아브라함의 복을 물려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는 의미는,
이들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물려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자신의 생애를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하였듯이(창 47:9)
야곱은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자기 부인의 훈련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때는
허벅지 관절이 어그러져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에서였습니다(창 32:25).
얍복강 가에서 야곱은 완전히 깨져서 자신의 꾀와 힘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온전히 하나님만 붙들고 늘어지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고 그 기도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야곱의 믿음도 모두 이런 믿음입니다.
자신은 확실히 깨지고 온전히 하나님만 붙드는,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이 믿음을 물려받은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단순히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지 않음을 또한 알게 됩니다.
[롬 9:6-8] 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그렇습니다. 영적 이스라엘만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됩니다.
이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상속받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젖과 믿음의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에 대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땅을 진정으로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소원을 우리 안에 일으켜 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근본적인 은혜입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믿음이 복의 토대입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이 거꾸로 이름을 창대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입니다.
믿음을 길러주는 가나안 땅은 자기 부인을 훈련시키는 땅이기에,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이름을 창대하게 만들어주는 땅이 됩니다(2절).
시날에서 바벨탑을 쌓아서 이름을 내려고 했던 자들은
오히려 그 이름이 산산조각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 훈련을 잘 받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주십니다. 영광스러운 이름을 만들어주십니다.
가나안 땅은 바벨탑을 쌓은 자들의 땅과는 전혀 반대되는 땅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수답만 있는 가나안 땅으로 이끄신다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땅으로 들어가라 하시면,
이런 땅에 모든 것을 다 들고 들어가라고 명령하신다면,
과연 우리는 순종할 수 있을까요 ...?
가만히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부인의 믿음을 복이랍시고 우리에게 자꾸 키워주시고 부어 주신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까요?
더 나아가서 내게 주신 그 복을 땅의 모든 족속에게 자랑하고 전수하는 일에 나설 수 있을까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것을 하였기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브라함도 온전한 믿음으로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지만
결국 새 하늘과 새 땅, 새 생명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서’의 자기중심적인 삶을 부인하는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갖기를 소원하며
오늘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주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아브람처럼 순종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아브람은 알지 못하고 갔지만,
알고서도 오히려 기쁜 맘으로 갈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 되기 원합니다.
혹시 알고서는 갈 수 없는 연약한 믿음이라면,
알지 못한 채로 밀어 넣으시고 거기서 참 믿음을 배우게 해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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