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조급함, 기다림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1. 21. 21:00

2026.1.22. 목요일

창세기 16:1-16

 

- 사래와 하갈의 불화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 천사를 만난 하갈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이 사자가 또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 이스마엘의 출생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

 

 

--------------------------

[ 살피시는 눈, 들으시는 귀 ]

 

사래의 조급한 결정으로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잉태하나,

가정이 분열되고 하갈은 광야로 내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하갈을 만나 약속과 위로를 주십니다.

 

(7-8절)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지를 알려 주십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는 질문은 단지 위치를 묻는 말씀이 아닙니다.

존재의 근원을 일깨우는 물음입니다.

하갈은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하지만, 나아갈 곳을 알지 못합니다.

목적을 잃은 도망자의 발걸음은 방황하다가 광야에 멈춰 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르면 우리 삶은 방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부르심을 따를 때, 방황이 끝나고 순례가 시작됩니다.

 

(9-12절)

상한 자의 울음소리를 들으십니다.

하갈의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심)이라 하신 것이 응답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울음과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사람의 귀에 닿지 않는 울음이라도, 하나님의 귀에는 닿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 가까이에 계시며(시 34:18), 부르짖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눅 18:7).

하나님은 고통의 깊은 자리에 가장 먼저 귀를 기울이십니다.

 

(13-16절)

나를 보시는 분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히. 엘 로이)이라 부릅니다.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보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시선은 존재를 다시 일으키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고, 두려움은 새로운 발걸음으로 변합니다.

'브엘라해로이'(살아 계셔서 나를 보시는 이의 샘)라는 하갈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셨기에, 나는 다시 일어섭니다.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 거기가 곧 생명의 자리입니다.

 

(1-6절)

인간의 조급함은 평안을 잃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진전이 없어 보이자,

사래는 여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고자 했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으나,

믿음의 여정에서는 불신과 조급함의 표출이었습니다.

그 결정이 결국 불화와 이별을 낳았습니다.

인간의 조급함이 하나님의 때를 앞질러 갈 때 일을 그르칩니다.

약속을 받는 길은 '기다림'과 '순종'입니다.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의 선한 눈으로 감찰하여 주소서.

 

==================

[ 기다림과 믿음 ]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하나님은 왜 사래가 무리수 두는 것을 막지 않고 보고만 계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조금만 간섭하셨더라면 지금 중동의 비극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12절은 중동 문제, 이슬람(아랍) 문제가 사래의 무리수로 비롯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자기 여종을 첩으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으라고 종용하였습니다. 

아브람이 못이긴 척 사래의 말에 따랐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이며, 

이 이스마엘이 지금의 이슬람(아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슬람(아랍) 족속은 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스마엘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몸종인 주제에 아브람의 아이를 배었다고 주인을 멸시하기 시작하는 하갈의 심보가 못됐습니다. 

그렇다고 줬던 자리 다시 뺏는 사래의 심보도 못지 않습니다. 둘 다 못됐습니다

그런데 사래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녀가 기다린 세월이 얼마인가요? 

25세에 결혼을 했다고 치면, 무려 50년을 아들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3절에 의하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여종을 첩으로 준 때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년 후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때는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12:4). 

그러니 16장에서의 아브람 나이는 85세, 사래 나이 75세입니다(17:7절을 보면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차이가 10년입니다). 

가나안 땅에 오기 전에도 오래 기다렸는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또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75세가 되도록, 50년을 기다렸습니다. 

약속이나 말든지, 약속을 해 놓고도 도무지 이루어 주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또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무리수에 무리수가 중첩되어 부작용이 나타날 것 뻔히 아시면서도 그리하십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도모하면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말 기다리기 힘든 사래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무정하신 하나님...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오고 오는 세대에 두고두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믿음의 본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교회와 그가 속한 온 지역에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목사만 그럴까요.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게 믿음의 아버지요 믿음의 본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를 철저한 믿음의 본으로, 

확실한 믿음의 1세대로 세우셔서 세상에 선보이실 작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라야지 도리 없습니다. 

깨지고 부서지면서, 창피당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제대로 된 믿음의 선배 되려면... ㅠㅠ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내가 잘하는 방법으로 하시지 않고 

내가 전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일하시길 즐겨 하십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헛심 쓰지 말고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의 훈련에 전념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 형편없이 부족하니까요.

주님, 믿음의 계보에서 1세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본데가 있는 목사 되기를 원합니다. 

너무나 부족하지만, 불가능해 보이지만, ‘아만’의 하나님이시니 이루실 줄 믿습니다. 

힘들어도 기다릴 수 있는 믿음 더하여 주십시오. 

 

아멘!

'2026년 영성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그네 환대  (0) 2026.01.22
할례  (0) 2026.01.21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1) 2026.01.21
믿음을 위한 전쟁  (0) 2026.01.20
양보  (1) 2026.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