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24. 토요일
창세기 18:1-15
- 아브라함의 환대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리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데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사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사라의 출산 예고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사라의 웃음과 부인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
[ 환대와 믿음 ]
아브라함은 정체 모를 나그네들을 극진히 환대하며 하나님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불가능을 약속으로 바꾸셨습니다.
(9-10절)
사라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아들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시간 속에서 일하십니다.
늦었다고 여길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기다림 속에서 지치더라도,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11-13절)
우리의 의심 속에서도 신실하십니다.
사라는 장막 안에서 웃었습니다. 약속보다 현실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신의 웃음을 계기로 삼아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우리이 연약함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또 다른 자리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꾸짖기보다 기다리시며, 이심 속에서도 약속을 새기십니다.
(14-15절)
믿지 못하는 사라에게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고 질문하시며
사라를 믿음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불신이 약속의 실현을 막지 못합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머무는 것이니다.
말슴은 우리의 확신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의심보다 단단합니다.
(1-5절)
아브라함은 눈앞의 세 나그네가 알지 못했지만, 망설임 없이 달려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무더운 한낮, 자신이 누릴 쉼을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믿음은 종종 이렇게 '낯선 이를 향한 열린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열린 마음의 장막에 머무십니다.
(6-8절)
아브라함은 급히 떡을 준비하고,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아 정성껏 손님들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지만, 진심으로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진심을 기쁘게 받으시며, 그 식탁을 약속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섬길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마 25:40 히 13:2).
사랑으로 친절을 베풀 때, 일상의 예배가 되고, 평범한 식탁이 성소가 됩니다.
낯선 이를 대할 때마다 주님을 맞이하듯 섬기게 하소서.
========================
[ 믿음 없음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
찬송가 281장 요나처럼 순종 않고
부창부수(남편이 창(노래)을 하면 아내가 따라 한다)란 말이 있지요.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가 그렇네요.
17:17절에서 아브라함이 웃더니, 18:12절에서는 사라가 똑같이 웃습니다.
사라를 통해, 이삭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픽 웃으면서 불신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라도 똑같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 없는 것 같은 행동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여러 번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단 한 번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철회를 고민하는 기미도 보이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패할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을
그 믿음을 직접 만들어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만들어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증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오셔서 그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의 믿음이 대단함을 격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 없이 행한 짓을 들춰내십니다.
아니라고 변명하는데도 굳이 끝까지 웃었다는 사실을 꼬집으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웃음으로 불신을 나타냈지만,
다른 면에서는 칭찬할 모습과 행동을 보였습니다.
범상찮은 사람들 같아 보였지만 나그네입니다. 그냥 모른척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려나가 영접하고 겸손하게 대접합니다(2절).
관례에 따라 형식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서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최상품의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게 하고(6절),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요즘으로 치면 A++한우)를 잡았습니다(7절).
하인을 시켜도 될 텐데 직접 식사 시중을 들었습니다(8절).
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그들이 그렇게 불신의 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24년이 지나도록 약속의 자녀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중간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언약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5년을 더 기다렸습니다. 그런데도 언약을 이을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불임의 여인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기다렸지만, 마침내 설상가상으로 사라에게서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그런 이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아브라함에게 내년에는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과 사라를 달래주셔야 합니다.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겸손한 섬김을 칭찬하셔야 합니다.
최소한 사라가 웃은 사실을 꼬집고 들춰내지는 마셔야 합니다.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면 마땅히 장점은 칭찬해 주고 단점은 덮어주셔야 합니다.
'미안하다, 너희가 못 믿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너희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표적을 보여줄 테니, 이것을 보고 믿음을 가지도록 하거라.' 이러시면서,
놀라운 능력으로 믿음을 북돋아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라를 무안하게 만드십니다. 직설적으로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변명하는 사라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재차 잘못을 확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요?
덮어주고 넘어가 주는, 멋있는 하나님을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음을 만들어가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잘못을 드러내심으로써,
사라 자신이 믿음 없는 자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십니다.
믿음이 자라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크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아니고,
자신의 믿음이 너무나 보잘것없음이 폭로될 때입니다.
춤은 칭찬으로 잘 추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믿음은 칭찬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부심을 느낄 때보다 부족함을 느낄 때 더 잘 자랍니다.
믿음은 높아지고 커질 때보다 부서지고 넘어질 때 오히려 굳게 세워집니다.
[예레미야 1: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만들어가시는 방법은,
믿음이 잘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과 토양을 제공함으로써가 아닙니다.
사래가 사라가 된 것은 그녀에게서 믿음의 싹이 보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라가 선택된 것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녀에게 믿음을 가질 만한 좋은(우리 생각에 좋은) 자질이나 조건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볼 때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여자를 선택하여
열국의 어머니로 삼으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경험과 상황에 근거한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는 상관없는 믿음입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나 믿음은 그런 식으로 형성될 수 있고, 또 그 정도 수준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수준을 뛰어넘는 믿음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 없음을 여지없이 드러내십니다.
참된 믿음은 인간에 대한 신뢰, 상황에 대한 신뢰와 전혀 무관함을 가르치십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 없음을 폭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린 분들이 이 정도인데, 나의 믿음의 진짜 모습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나는 과연 아브라함이나 오늘 본문의 사라보다 나은 믿음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며 살펴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들을 나는 얼마나 가감 없이, 의심 없이 믿고 있나?’하는 물음에 대답을 해 봅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깨진 것 때문에 낙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변하지 않는 상황 때문에 포기해 버린 불신앙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너는 아브라함보다, 사라보다 형편없이 부족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폭로하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용기와 소망을 주십니다.
믿음이 적은 것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믿음 없음을 인정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고, 믿음이 크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하십니다.
믿음 없는 것을 알고, 믿음 없음을 지적하여 주시는 말씀을 자꾸 들으라고 하십니다.
더디 듣는 자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여 주시는, 다시 지적하여 주시는 주 성령님 감사합니다.
사라처럼 두 번째에 굴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너 번째에는 인정하여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온전한 믿음 받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2026년 영성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소돔성에서 의인으로 사는 길 (0) | 2026.01.26 |
|---|---|
|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 사이에서 (1) | 2026.01.25 |
| 할례 (0) | 2026.01.21 |
| 조급함, 기다림 (0) | 2026.01.21 |
|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1) | 2026.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