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7. 토요일
요한복음 3장 16-21절
-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계획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빛을 대하는 상반된 태도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모든 성도들이 좋아하고 암송하는 구절 요한복음 3장 16절은
간결하고도 구원의 핵심이 들어있는 구절이다.
인간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있을까?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생각한다.
사람의 머리로는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한 마디로 한량없는, 무한한 사랑의 크기이다.
예수님을 닮기 원하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닮았을까?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나의 사랑은 주님의 신발 먼지만도 못한 사랑의 수준같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이토록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기에
순종하고 선한 자들도 아닌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시는 것인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시는가
쉽게 포기하고 돌아서는 얄팍하고 단회적인 현대인들의 사랑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복음을 들을 수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구원, 그 사랑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구원
내가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고, 받아 누릴 수 없었던 미천하고 죄악 덩어리임을 고백한다.
나같은 자가 그 사랑 받아 누리게 하심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격하며 감사할 뿐이다.
유구무언이다. 감사 외에는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 밖에는 할 일이 없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서 하늘 위에서부터 독생자가 오셔야 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있었다.
빛으로 오신 그 분을 죄에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했다.
죄악에 물들어 어둠을 빛보다 더 사랑하게 되버린 인생들이었다.
그분은 구원주로 오셨다.
아직 심판주로 오시지 않았다. 다시 오실 때는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을 믿음으로, 독생자의 이름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음으로
심판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구원의 길을 안내해 주셨다.
당신의 입으로, 제자들이 전해 준 말씀으로 이 복음을 듣고 알게 되었다.
오직 이 믿음을 단단히 붙잡고 살아갈 뿐이다.
주님
사랑의 주님,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 무한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주님만 믿고 따라 살겠습니다.
성령님이여,
하나님의 사랑에 더 푹 잠기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며, 닮아가게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오늘도 이웃들을, 구역장들을 주님 닮은 사랑으로 사랑하고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하게 하시고 이웃에게 흘러보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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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니고데모에게 '인자가 들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6절)
세상을 사랑하시되 '이처럼', 즉 인자가 십자가에 들리는 방식(3:14)으로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결과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헬. 모노게네스)는 출생이 아닌 유일성과 독특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유일무이한 존재를
세상에게 내어 주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받아 마땅한 이들에게 베푸신 사랑이 아니라,
거부하고 반항하고 멸망을 자초하는 '세상'을
돌이켜 세우고 영생의 길로 잡아끄는 사랑입니다.
세상에 찌들어 사느라 주께 면목 없는 나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그 심정으로
나의 오늘을 영생과 잇닿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끝없는 삶, 죽은 후의 삶이 전부가 아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의 지금을 특징짓는 새로운 존재 질서입니다.
(17절)
죄악 가득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들에게 육신을 입혀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몸소 찾아가 한 명이라도 더 찾으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 받아 마땅한 이는 없다는 증거는
나에게도 기어코 전해진 복음입니다.
( 18-19절)
세상에 주신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17절)과 모순되는 것 같지만,
구원만을 목적하시기에
그 분명한 목적을 거절한 이들에게 그 결과로 심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지막 날에 드러날 심판을 자초하며
오늘도 별일 없이 살아가는 악인들의 성공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19-21절)
어둠은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진리)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기준으로 삼고 자기 맘대로 삽니다.
그것이 악입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은 자기주도권을 내어놓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아옵니다.
진리를 행하며 믿은 대로 삽니다.
묵상이 어려운 것은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여전히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신 주님, 저도 전부를 바쳐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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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시작 ]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요한복음 3:1-21절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생명에 관해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15절까지 대화가 일단락되고 새로운 대화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16절부터 다른 단락으로 나누어 말씀을 묵상하게 한 것이 조금 의아합니다.
더구나 15절과 16절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계속 이어지는 부분이어서
단락을 나누기에 적절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물론 17절 이후에 심판에 관한 말씀이 나와서 조금 다른 면으로 묵상할 여지가 있지만,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과 밀접하게 연결된 말씀임을 염두에 두고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위로부터 나는 것, 거듭남, 중생, 구원, 영생, 이런 개념들은
이 세상에 없는 것들입니다. 하늘에 속한 일들입니다.
우리 눈에, 귀에, 손에 명확히 보이고 들리며 만져지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보내신 목적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시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3:16절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따로 떼어서 요절로 외울 때에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강조점이 앞부분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3:1-21절의 전체 문맥을 통해서 보면, 16절의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14-15절 말씀의 강조점이 믿음이고, 16절은 이를 다시 한번 강조한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신 것은,
믿으라고 주신 것이지
이해하라고 분석하고 파악해서
스스로 길을 정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 3:16절의 강조점은 ‘믿는 자마다’(문자적인 번역은 ‘모든(every) 믿는 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요 근거이십니다.
부활과 영생, 천국, 지옥 등 하나님께 속한 일들은
지금 우리 인간의 이해력과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구원에 관한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육신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기회를 다른 데서 얻을 수 없습니다.
나사의 우주망원경으로 관측한다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정교한 실험으로도 하나님 나라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위로부터 나는 일은 위로부터 오신 분을 믿는 것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고백한 것처럼(2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 들은 자들은,
그 표적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표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달리 예수님의 표적을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이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기록된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져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요 20:31).
이를 위하여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사도들이 기록한 말씀들이 진실이라는 증거는 그들의 순교입니다.
사도들은 순교로써 자신들이 믿고 증언한 것이 진실임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증인'(마르튀스)이라는 말이 '순교자'라는 뜻을 가지게까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죽을 때까지 유배 생활을 함으로써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었고,
나머지 모든 제자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록해서 남겨준 말씀이 우리가 가진 신약성경입니다.
거짓으로 기록한 내용을 증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단 사이비 교주들을 보면 영생과 천국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들이 믿는 것은 ‘돈’입니다.
남들은 순교를 시켜도 자신은 결코 순교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는 곧 예수님 재림하시니 돈 쌓아놓고 있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뒤로 부동산 투기하고 금 사재기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들은 거의가 다 순교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기록한 말씀이 진실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순교하게 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소식, 이것을 복음이라 하지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제자들의 순교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그들의 믿음과 증언이 참된 줄 알게 됩니다(요 21:24).
그리고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순교한 제자들의 증언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시작됩니다.
믿음의 시작은
예수님의 말씀, 빛의 말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밝혀주는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빛으로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 불신의 행위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왜 빛으로 나오지 않는지도 확인해 주십니다.
자기의 어두운 상태가 드러날까 싶어서 빛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도 어두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어두운 상태가 즉각적으로 제거되고 선함이 가득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는 자신의 어두움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기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생명, 새로운 자기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 옛 자기가 드러나고 그것이 성령의 세례를 통해 부정당하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렇게 빛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
마침내 그는 진리를 따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더욱 열심히 빛 가운데로 나아갑니다.
모든 옛것을 부인당하는 그 자리에 자청하여 나아갑니다(21절).
제자들을 통해,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이 말씀의 빛을 꺼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주시는 세례를 달게 받겠습니다.
말씀의 빛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에까지 이르도록 우리를 끌어올려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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