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2.10. 화요일
요한복음 4장 15-26절
- 여인의 요청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여인의 상황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예배에 대한 가르침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심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하시니라.
....................................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목마름을 해결하는 물, 생수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여자의 개인사로 넘어가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라 선지자 같다는 느낌을 받자
궁금했던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러나 주님은 장소보다 때를 말씀하시고 지금이 그 때라 하신다.
지금 여인 앞에 계신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를 예배하여야 하고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인이 그리스도가 오시면 다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자
예수님이 '내가 그라' 하시며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들어 내신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누구신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복음서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신 영이시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참된 예배란 어떤 것인가? 그것이 핵심이다.
영과 진리에서, 영은 성령이요 진리는 진리로 오신 예수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즉 예수님과 성령으로, 진리인 말씀과 성령으로 예배해야 한다.
때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어떻게 예배해야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인지 가르쳐 주신다.
주님
수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중에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는 몇 번이나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참된 예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게 도와주소서.
어떤 예배도 허투로 드리지 않고 소흘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거룩한 참된 예배자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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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물 길으러 나오는 것을 괴로워하는 여인의 목마름을 아시고,
예수님은 인생의 지독한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참된 예배로 초대하십니다.
( 15-18절)
우리의 감추어진 목마름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것과 지금 사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으로
여인이 자신의 목마름에 직면하게 하시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성령, 7:37-39)를 기대하게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내 실상을 이 정도로 안다면
나를 피해 도망가 울타리를 치고 상종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도리어 찾아와 생수를 마시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드러내어 부끄럽게 하시려는 분이 아니라,
그 깊은 상처의 자리에 생수를 흘려보내는 분입니다.
주님 앞에서 숨길 것도, 포장할 것도 없습니다.
아픔과 슬픔은 예수님 앞에서 드러날 때 치유됩니다.
(19-24절)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대하 6:6).
그러나 모세오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예배 장소로 언급된 그리심산을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신 11:29, 27:12).
두 장소 중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묻는 여인의 질문에 예수님은 둘 다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장소와 상관없이 '영과 진리'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자 진리이신 예수님(1:14, 14:6)과 예수님이 부어 주시는 성령( 1:33) 안에서 예배할 때
존재의 근원적인 목마름이 해갈될 수 있습니다.
(25-26절)
기다림의 끝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음을 고백하며,
인생의 목마름이 해소되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드러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이 한마디는 그녀의 인생을 뒤흔든 계시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전통의 무대가 아니라,
상처 입은 한 여인의 심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높은 성전이 아니라 깨진 마음의 자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기다림의 끝에 다가와 "내가 그다"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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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급한 마음에 생수로 채워주시는 예수님 ]
찬송가 526장 목 마른 자들아
수가라는 동네에 다른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이 한 여자에게 먼저 접촉을 시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기구한 삶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남편을 만나기를 갈망하였지만 다섯 번의 실패를 겪은 후에는
아예 포기한 상태로 남편도 아닌 남자와 같이 동거하고 있던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를 행실이 나쁜 여자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이 여자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낮에 물을 길러 나왔다고 해석을 합니다.
6절의 ‘여섯 시’를 유대인의 시간 구분법에 따라 낮 12시로 해석한 경우입니다.
예수님과 여자의 대화가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어
그 시간에 물 길으러 나오는 여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추론합니다.
오후 6시면 저녁을 준비하는 시각이고 물 길으러 나오는 여자가 많았을 것이니
이 시각은 오후 6시가 아니라 유대인의 시간 구분법으로 제6시 즉 정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19:14절을 보면,
요한복음은 로마의 시간 계산법(지금 우리와 같이 정오를 12시로 계산하는 방식)을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한 사람 요한이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기록한 계시로 이해합니다.
전체로 한 덩어리의 글을 쓰면서 어떤 곳(4장)에서는 유대식 시간 계산법을 따르고
다른 곳(19장)에서는 로마식 시간 계산법을 적용하는 일은 매우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이 비상식을 설명할 만한 특별한 이유나 언급이 요한복음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물 긷는 여자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 여자와 예수님의 대화를 방해했을 것이라고 추론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이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물만 긷고 돌아갔었을 수 있습니다.
물 긷는 행위는 대화를 방해할 만큼 그렇게 소란스러운 행위가 아닙니다.
6절의 여섯 시는 오후 6시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며,
이때는 정상적으로 여자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여자를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여자라고 보는 견해는 충분한 타당성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한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상황을 보면(28-30절)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을 보면,
이 여자가 어느 정도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남편을 다섯이나 두게 된 것은,
여자 편에서 남자를 바꾼 것이라기보다
사별이나 다른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한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여자가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우는 것은
당시의 남성중심적인 사회풍토에서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상황은 비난거리였다기보다 동정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여자는 참으로 가난함과 애통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여자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 뻥 뚫린 가슴을 채우기 위해 성전을 찾아 예배를 드려 보았지만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한 여자의 첫 질문이
참 예배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 여자의 중심에 예배에 대한 관심과 갈증이 깊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케세라세라’로 살지 않았습니다.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수가성의 여인은 오히려 더 갈급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배척하는 자들을 뒤로한 채, 이 사마리아의 여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여자의 참 남편이 되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참 남편을 통한 참 예배의 길, 갈증을 해소하는 참 예배의 길을 안내하셨습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
성령 안에서(in sprit),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in truth) 드리는 예배만이 진짜 예배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참 예배를 이 여자와 사마리아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in Jerusalem)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유대인들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심산의(in this mountain) 성전으로는 뭔가 부족하여 목말라하던 사마리아 여자는
참 성전 예수님을 단숨에 받아들였습니다.
무엇이 진짜 복인지 생각해 봅니다.
지금 풍족하고 넉넉한 것이 반드시 복은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뭔가 부족하고 잘 안 풀려 마음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생명과 참 복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었다면
오히려 그것이 복일 수 있다는 것을 사마리아 여자를 통해서 배웁니다.
나의 상한 마음이, 나의 갈급함이;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게 하는, 예수님을 굳게 붙들게 하는 동인이 된다면
그 상함과 갈급함은 분명 복입니다.
주님, 공허함 때문에, 갈급함 때문에 주님을 더 간절히 찾게 만드시옵소서.
넉넉하고 풍족한 생활 때문에 예수님 잊어버리고 살지 않게 일깨워 주옵소서.
애통하는 마음에 자기 부인의 말씀을 더하시어 갈급하게 만드시옵소서.
갈급한 마음에 생수로 채워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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